겨울을 지나가다

2026-02-05     장정우 칼럼·독자위원
<strong>장정우</strong>

“우리는 늙어가며 시간을 발견한다.” 
- 장 아메리

1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동지가 얼마 전 같은데, 가장 추운 절기인 대한을 지나 눈이 녹아 물(비)이 된다는 우수(雨水)를 향해가고 있다. 어릴 때부터 긴 겨울이 되면 실컷 잠을 자겠다든가 미루던 장편 소설을 독파하겠다거나 공부나 운동을 꾸준히 하는 습관을 들이겠다는 식의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어느새 새해라든가, 한 살 더 먹은 나이를 헤아리는 것을 멈추고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 모두 다 똑같은 하루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나는 나이를 먹어가는 것 아닐까.

무덤덤하게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것, 일상은 이렇듯 익숙해짐과 가까이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은 일상은 불쑥 다가온 사건들로 너무나 쉽게 깨지곤 한다. 그리고 부서져 버린 잔해를 마주하고서야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함과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연약한 토대 위에 서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조해진의 소설 《겨울을 지나가다》는 추천사에 적혀 있듯 엄마를 떠나보낸 주인공이 겨울을 지내며 “엄마의 부재를 정성껏 애도하며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밤이 가장 긴 동지에 췌장암으로 엄마를 떠나보내며 시작한다. 딸인 정연은 엄마의 집에 남아 부서진 일상을 살아낸다. ‘시간이 담긴 그릇’. 저자는 사람의 몸을 이렇게 표현한다. 한 사람이 사라진다면 그 사람의 시간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부재와 그로 인한 단절 앞에 남겨진 이는 당황스럽고 이어지는 밤은 길고 춥다. 소설은 ‘엄마’의 부재를 다루지만, 독자에게 저마다의 ‘부재’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도 이번 겨울 여러 일이 일어나며 마을의 일상이 흔들리고 있다. 학교는 새로운 교장선생님을 모셔야 하고, 마을 교사들과 주민들은 함께 수업할 선생님을 찾고, 우리동네의원은 의사 선생님을 구하며 원장님이 복귀할 때까지의 대책을 마련하느라 바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빈자리가 이렇게 크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꼭 죽음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마을을 떠나간 친구, 가까이 지냈었지만 관계가 어느샌가 멀어진 사람, 새로운 일을 시작한 전 동료. 

소설 속 인물 정연은 엄마가 없는 엄마의 집에서 겨울을 지나며 엄마 신발을 신고, 엄마가 정연과 미연(동생)의 이름을 따서 이름 붙인 강아지 정미와 산책을 한다. 그러다 엄마의 식당에서 엄마가 선물로 남겨둔 김치를 먹고, 엄마의 옷을 입고, 엄마의 레시피를 곱씹으며 칼국수를 끓여 먹는다. 문득 찾아온 동생과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웃으며 이야기 나누기도 한다. 엄마의 단골손님과 칼국수를 나눠 먹고, 때로는 우연히 찾아온 손님의 칼국수 주문에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준비한다. 엄마가 살뜰히 챙기던 동네 할머니에게 식사를 대접하다 외할머니와 겹치는 얼굴을 발견하기도 하고 동네 이웃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렇게 소설은 동지에서 대한으로, 대한에서 우수로 나아간다. 정연은 그 시간 속에서 “녹은 눈과 얼음은 기화하여 구름의 일부로 소급될 것이고 구름은 다시 비로 내려(雨水) 부지런히 순환하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차에 도달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책을 읽는 우리도 정연이 그랬듯 겨울을 지나간다. 우리는 계절의 흐름 속에서 시간의 유한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순환하고 반복하는 자연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는 정연과 우리 모두에게 큰 위안이 돼준다. 

누군가 떠난 자리에 남는 것은 단순히 슬픔만은 아닐 것이다. “부재하면서 존재한다는 것, 부재로써 현존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누군가가 떠난 자리에는 흔적이 남을 것이다. 그러니 일상의 ‘회복’이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고, 다시 눈이 녹아 비가 되는 계절이 온다는 사실. 자연이 순환하고 반복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또 다른 시작을 믿게 한다. 그들이 남긴 흔적 위에서 또다시 누군가와 수업을 함께하고, 닫혔던 병원 문을 다시 열고, 떠났던 이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새로운 관계 속에서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수 있음을.

그러니까 이 소설이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하다. 무조건적인 낙관이 아니라, 어떤 힘든 시기(겨울)가 끝나면서 또 다른 시작(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동시에 그 믿음을 공유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된다는 말이다. 오늘 각자의 겨울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조해진 작가의 《겨울을 지나가다》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