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의지 산실 땅굴 움막교실서 천막교실로 ‘양지’찾다

발굴, 잊혀진 홍성교육사②

2026-02-12     한관우 발행인

홍성지역 야학(夜學)의 효시는 1964년 10월 1일 홍성고등학교 1~3학년 재학생 45명으로 구성, 학생 봉사 모임으로 출발한 ‘홍성고등학교 양지회(陽地會)’로부터 시작됐다.

이들 양지회 회원 45명은 홍성고에 재학 중에도 지역사회 봉사 활동 등에 앞장섰다. 뜻을 같이한 회원들은 주말과 공휴일, 방학 기간 등을 이용해 농촌계몽 운동에도 솔선했다. 절미운동, 우물 파주기, 부업장려, 이웃돕기운동 등을 하다가 당시 너무도 많은 어린이들이 가난에 짓눌려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게 되는 현실에 직면했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목격하면서 양지회 회원들은 홍성읍 소향리 산 171번지에 움막교실을 짓고 당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모아 야학(夜學)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서 당시 양지회 회원들이 실천했던 농촌계몽운동(農村啓蒙運動)과 절미운동(節米運動)에 대해 살펴보면, 당시 농촌계몽운동의 주체는 농민이 아닌 지식인 학생이므로 성격상 농민들이 주체가 된 농민운동과는 구별된다. 또한 농민의 의식 또는 지식을 개발하는 교육 활동이나 학교 교육과는 구분되는 사회교육 현상이며, 민족운동의 측면에서는 사회·문화운동의 영역에 해당된다. 농촌계몽운동은 주체가 농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농민운동이 아니라 농촌운동이었다. 교육 활동이면서 학교 교육이 아니라 사회교육의 범주에 속했다. 일제의 지배체제에 항거해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 전개됐다. 농촌계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깊은 산골에서도 한글을 익히며 민족의 운명을 토론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농촌에서 지식 청년과 학생, 농민, 농촌의 어린이가 민족의 공감대를 통해 독립의식을 고조 시켜 나갔다. 당시 심훈의 ‘상록수’와 이광수의 ‘흙’은 이러한 농촌 사회의 현실을 묘사한 작품이다.

■ 그 시절의 절미운동(節米運動) 이란?
우리 민족은 주식(主食)인 쌀의 생산량 부족으로 인해 기아와 초근목피의 삶을 살아왔다. 조선 시대에도 쌀 부족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됐고 국가의 주요한 관심 사항이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으로 ‘절미운동(節米運動)’이 전개되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 시대가 되면서 쌀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절미운동을 강력하게 시행했다. 군수, 경찰서장, 면장 등이 미곡(米穀)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절미운동 위반을 감시·관리했고,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를 하고 혼분식을 장려했다.

일제강점기의 절미운동 방식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면서 진행돼 왔다.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과 쌀 생산량의 부족으로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보릿고개’로 기아와 빈곤이 심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1월 서울시장이 절미에 관한 특별 담화를 발표해 쌀이 원료가 되는 술, 떡, 과자 등의 제조를 금지했다. 1956년에는 농림부, 내무부, 재무부 합의로 1년 동안 50만 석의 쌀 절약을 목표로 절미운동을 전개했고, 혼분식으로 식생활을 변화시킬 것을 장려했다.

1960년대 초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의 주도로 ‘절미운동(節米運動)’이 추진됐다. 1964년 농림부는 양곡 소비 절약 지침을 통해 절미운동을 전개했고, 1969년에는 무미일(無米日)을 지정해 음식점, 여관 등에서 매주 수요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을 원료로 하는 모든 음식 판매를 금지했으며, 모든 음식에서 25% 이상의 혼식을 하도록 권장했다. 1970년대에는 국가의 핵심 사업이었던 새마을운동 과정에서도 ‘절미운동(節米運動)’이 추진됐다.

해방 이후 한국의 정부 주도 절미운동은 쌀 소비를 억제하고 대신 혼분식을 장려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쌀 생산의 증대와 혼분식의 대중화로 ‘절미운동(節米運動)’은 사라지게 됐다.

■ 땅굴 움막교사 짓고 ‘야학’활동 시작해
1965년 홍성고등학교 양지회 회장을 맡고 있던 정덕영 회장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9명의 동지들은 ‘혈서맹약;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알의 밀알이 되기로 약속한 혈서)’을 하고 함께 1965년 2월, 당시 홍성군수의 배려로 홍성읍 소향리 소재 군 임야 6420평을 임대받아 그중 2000평의 황무지에 일부는 토굴을 파 움막을 짓고, 일부는 천막을 치고 야학(夜學) ‘청석중학원(靑石中學院)’을 개설한다. 1965년 4월 1일의 일이다. 양지회 회원들은 소향리 산 171번지에 움막교실을 짓고 지붕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움막 단칸 교실에서 멍석을 바닥에 깔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밤에는 초롱불을 켜놓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문맹 퇴치에 앞장섰고, 낮에는 폐허의 황무지 산비탈을 개간해 밭을 일구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면 농촌 계몽운동과 봉사 활동에도 앞장섰다. 
 

이러한 양지회 회원들의 봉사 활동 사실이 처음으로 언론에 보도된 것은 1965년 1월 7일 자 지방신문인 대전일보(大田日報)의 기사다. ‘自進農村奉仕活動(자진농촌봉사활동)’제하의 기사에 ‘홍성고양지회원 등 12명이’란 부제를 달고 보도됐다. “홍성고등학교 양지회(대표 정덕영=3학년) 회원 12명(천안농고생 3명 포함)은 동기휴가 기간을 이용 홍성군 결성면, 서부면, 은하면 그리고 구항면에 각각 가서 농촌계몽에 스스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보도한 기사다. 이때 천안농고생 3명이 포함됐다는 기사를 보면 홍성 출신의 학생들이 천안농고에 진학해 재학하면서 방학을 이용해 양지회 봉사 활동에 동참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또 당시 중앙일간지였던 대한일보(大韓日報) 1965년 5월 12일 자에는 ‘善行(선행)에 앞장선 學生(학생) 클럽-장한 그 이름 陽地會(양지회)-한뜻에 뭉친 洪城高校生(홍성고교생)들’ 제하의 기사에는 ‘節米(절미)로 孤兒(고아) 등을 돕고-靑石學院(청석학원)을 세워 運營(운영)-開墾(개간) 2천평 ’흙벽돌‘ 校舍(교사)도’란 부제를 달은 기사가 홍성발로 보도됐다. 

“【洪城】 ‘땅을 위한 땀, 인류를 위한 눈물, 하늘을 위한 피를 뿌림으로써 보다 살기좋은 우리 고장을 건설하자’고 한데 모여 지역사회 발전과 선행에 앞장서는 고교생들의 모임이 있다. 홍성고등학교생 정덕영(鄭德泳=21)군 외 44명은 작년 10월 1일부터 모임을 갖고 ‘양지회(陽地會)’를 구성, 그동안 보육원 아이들에게 회원들의 절미로 모은 쌀로 ‘노트’ 300권을 사서 홍성복지학원에 60권의 ‘노트’를 전달한 것을 비롯, 많은 선행을 해왔다. 이들은 작년 서산 앞바다에서 장배침몰사건 당시 유가족을 돕기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 현금 2천3백 원과 그들이 국경일과 매주 2회씩 결식해서 모은 쌀 3말을 전달한 사실도 있다. 

이들 ‘양지회’ 회원들은 지난 2월 말 홍성군 방상교(方相敎) 군수의 주선으로 얻은 홍성읍 소향리(昭香里) 군 임야 2천평에서 수업을 마치고 괭이와 삽을 들고 황무지를 개간, 호박 오이 등을 심고 있으며 빈곤 때문에 배움의 길을 잃고 중학과정에 진학 못하는 학생들 약 80명을 모아 청석(靑石)학원을 설립, 공부를 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일정한 배움터가 없어 지난달 11일부터 선생님과 원생들이 직접 흙벽돌을 만드는 등 전원이 일심동체가 되어 집짓기에 나서고 있으나 원래 맨주먹으로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지붕을 덮지 못하고 밀대 방석을 씌워 놓은 형편에 있어 그들의 갸륵한 뜻을 키워줄 사회의 따뜻한 손길이 아쉽다고 주민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양지회와 야학 ‘청석중학원’과 관련한 기사가 실렸다.

이와 관련 당시 홍성고 3학년으로 ‘양지회’ 회장을 맡아 농촌계몽운동과 봉사 활동을 이끌었던 정덕영(83·홍성읍 월산리) 회장은 “지난 1965년 홍성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3학년 때 당시 농촌계몽운동과 사회봉사에 뜻이 있는 1~2학년 후배들과 3학년 등 45명이 함께 ‘양지회’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어 주말과 공휴일, 방학 기간 등 쉬는 시간을 틈내 벽지만 찾아다니며 절미운동, 우물 파주기, 부업장려, 이웃돕기운동 등을 하다가 너무도 많은 어린이들이 가난에 짓눌려 당시에는 중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심지어는 국민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직접 보고 배움의 한을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군의 협조를 받아 홍성읍 소향리의 공동묘지 인근 산에 땅굴을 파고 바깥쪽은 흙벽돌로 쌓아 움막교실을 짓고 야학을 시작하게 됐다”고 회상하면서 “당시 홍성고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움막교실 대들보로 쓸 나무를 홍성고 담장에 심어졌던 플라타너스 한그루를 베어서 지게로 져다가 대들보로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고 설명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진에서 움막교실 천정을 떠받치고 있던 대들보에는 ‘흙의 동지 한데 뭉쳐 새역사를 창조하자’고 썼다.

학원의 이름을 ‘청석중학원’이라 한 연유는 상록수에 나오는 ‘청석골’에서 따왔다. 상록수의 실제 여주인공 ‘최영신’이 청석골 샘골마을(지금의 경기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천곡(샘골)강습소’를 개원하고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한 데서 출발한다. 
양지회를 이끈 정 회장은 “20대의 여성도 저렇게 해내는데 사나이로 태어나 못할 일이 있겠는냐’는 자신감에 감화(感化)됐고, 또 홍성 장곡 출신의 농촌계몽운동가 한인수의 강연을 듣고 감화돼 고등학교 선후배 동지들이 뜻을 모아 젊은 혈기로 뭉쳐서 두려움과 무서움도 모르고 ‘겁 없이’ 해냈다”는 설명이다.

당시 홍성고등학교 1~3학년 재학생들의 ‘양지회’의 설립이 영화 ‘상록수’를 보고 감화됐고, 한인수의 농촌계몽운동 관련 강연을 듣고 조직했다는 회원들의 증언과 맥이 맞닿았다.
‘청석중학원’은 당시 홍성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학생들(양지회원)이 스스로 참여해 움막교실을 짓고 교사(선생님)가 돼 직접 ‘중학강의록’을 만들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 ‘야학(夜學)’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잊혀진 일이 됐고, 기억에서도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홍성지역에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낮에는 집이나 사회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홍성지역 최초의 ‘야학(夜學)’으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홍성고 ‘양지회’ 회원들은 낮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신문팔이, 풀빵장수 등을 하면서 야학학원의 운영비를 마련했으며, 저녁 시간이 되면 야학(夜學) 교실로 출근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실천했던 것이다.

 

※1962~1967년 홍성고등학교 재학시절 양지회(陽地會) 회원들과 ‘청석중학원’과 ‘양지중학원’의 야학 과정을 수강한 분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또한 홍성재건학교, 홍성직업청소년학교, 복지중학교, 청석수련원 등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관련 내용을 알고 계신 분, 관련 자료나 사진, 앨범 등을 소유하고 계신 분, 기타 홍성지역의 재건학교, 고등공민학교 등과 관련된 제보를 기다립니다. 

-홍주일보·홍주신문 편집국(전화 041-631-8888, 우편 32278 홍성군 홍북읍 홍북로573번길 83)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