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올라타는 앎
지난해 여름 홍동에 시골집을 구했다. 함석지붕에 시멘트 담이 ‘ㅁ자’로 둘러쳐진 농가주택이다.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좀 고쳤다. 싱크대를 떼고, 벽을 새로 대고, 타일을 깔기도, 일부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하기도 했다. 천장, 벽, 바닥 곳곳 갈라진 틈새에는 꾸역꾸역 우레탄 폼을 채워 넣거나 실리콘으로 빈틈없이 메꿨다. 대강의 공사를 끝내고 책장을 비롯해 가구를 하나둘 들여놓으면서 단 한 군데도 평평한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네모반듯하게 만들어진 가구들은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벽과 어울리지 못하고 곳곳에 틈새를 벌려놨다.
새의 둥지는 숲에 떨어진 잔가지들로 만들어진다. 잔가지는 나무의 가장 가느다란 부분으로 어느 사이엔가 줄기나 가지에서 갈라져 나온다. 숲의 울창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따라 공중에 길을 내며 불규칙하게 자란다. 자기 내부의 자라는 힘과 외부의 힘(숲의 환경과 기존 잔가지가 자란 방향과 빛과 바람과 새)이 맞물리며 모양을 갖춰간다.
인간은 더이상 새처럼 집을 짓지 않는다. 곡선보다 직선이 좋고, 성긴 것보다 촘촘한 것이 좋고, 설계와 의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구현될수록 좋다. 안팎의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 자연의 본질적인 위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 기술과 인공물의 역사가 참 오래됐다. 아파트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고도화된 문명에서 최초의 발버둥침, 그 절박한 긴장과 신명은 옛날 일이 되었다. 덜 개발된 곳, 덜 발전한 곳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그 적나라함은 이제 겪지 않을수록 좋은 무엇이다.
지금 들어와 살고 있는 시골집은 애매한 지점에 있다. 새로 덮은 단정한 함석지붕 밑으로 옛날 처마에 흙과 짚풀과 굵기가 제각각인 통나무가 보인다. 반듯하게 만들고 수직으로 세웠을 문틀과 창문과 담벼락은 세월을 맞아 조금씩 틀어지고 무너졌다. 옛날 외양간 자리에는 시멘트로 굳힌 여물통과 불규칙한 형태의 주변에서 주워다가 썼을 것 같은 나무 기둥과 대들보가 함께 있다.
생명의 일은 변하는 것이다. 의무도 도덕도 없이 그냥 그렇게 한다. 아니, 된다. 직선은 틀어지고 촘촘한 벽에 구멍이 난다. 감가상각으로 치부되는 그것은 그야말로 자연스럽다. 인간과 자연이 대척점에 있는 것만 같은 시대, 새의 둥지와 같은 균형이 가능할까?
결국 정도의 문제다. 어디까지 뭉쳐놓고(인간) 어디까지 흩어놓을(자연) 것인가. 살아생전에 돌아감을 고려하는가. 동시대의 약자와 자연과 미래의 생명을 고려하는가. 어느 정도의 기술 수준이 적당하겠는가. 기술패권 시대 국가경쟁력이 먼저라는 큰 이야기 속에서 자원을 어디까지 빨아당길 것인가. AI를 뒷받침하는 에너지와 물질적 기반은 어디에서 오는가. 좋은 농사로 땅을 지킨다는 작은 이야기는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기만 한 것인가, 가장 시급한 일인가.
애매하고도 적정한 지점. 어차피 오십보백보 아니냐고 욕할지 몰라도, 사람과 사람 아닌 것과 미래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지점이 현실에 나타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는 시계가 있어야 시간이 가고, 네비게이션이 있어야 길을 찾을 수 있는 세계 안에 있다. 지식이 데이터 신호로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으면 그걸 아는 사람이 된다. 삶의 위태로움을 다루기 위해 함께 절박하게 기술과 지식이 탄생할 때, 그 최초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각자 다른 자연환경과 조응하며 만들어진 다양한 문화는 이제 박제된 채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 나라를 가도 대도시의 형태는 똑같다. 옛 문화의 이미지만을 몇 푼 담은 관광상품을 통해 그 나라 고유한 문화의 정수를 체험할 수 있다. 뿌리는 사라지고, 사라진 듯 가려지고, 있다 해도 중요하지 않고, 속없는 기호만이 나풀거린다.
삐딱하게 보자면 팀 잉골드의 《조응》은 좋은 시집처럼 감동은 있지만 되도 않는 소리를 열심히 아름답게 하는 책이다. 한마디로 자연에 흐름에 올라탄 앎을 회복하자는 것. 그게 곧 조응이다. 주체와 객체의 위치가 명확히 정해진 상호작용과는 다르다. 조응은 이를테면 잔가지의 생장선과 같은 것, 숲을 흔드는 바람과 그 바람에 따라 달라지는 햇빛의 각도와 기존 잔가지의 그림자와 잠깐 머물다 간 새의 무게가, 잔가지 내부의 자라는 힘과 동시에 맞물리며 공중에 이리저리 선을 그려가는 과정 그 자체다. 자연은 멈추지 않고 그 속의 생명들도 멈추지 않고, 그것들이 전부 동시에 있다. 잔가지의 불규칙한 모양새는 과연 누구의 것일까.
새는 그런 잔가지를 하나하나 주워다 집을 짓는다. 잔가지들이 서로 맞물려 집의 형태를 튼튼하게 유지하면서도 바람이 통할 만큼은 성기기 때문에 통째로 날아가는 일은 없다. 자연 속에서 이루는 또 하나의 균형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사람들은 주변의 흙과 나무와 돌을 이용해서 집을 짓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앎은 새의 앎과 닮았다. 산업화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아주 신기하고, 어쩌면 저개발의 상징과 같이 전문성이 떨어지는 미개한 일이다.
주변에서 쓸만해 보이는 것들을 가져다 이리저리 대봤겠지. 운 좋게 모양새가 맞물려 그대로 써먹기도 하고, 적당한 모양이 없어 막막하기도 했겠지. 그러다 보면 주변의 흙과 나무들에 대해, 숲을 가꾸고 유지하는 것에 대해, 장소를 몸으로 알고 있는 이웃들의 지혜와 연륜과 그것들의 소중함에 대해 저절로 알았겠지. 그게 곧 문화. 주변 자연과 조응하는 고유한 문화. 살아있었겠지.
조응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라고까지 말하는 몽상같은 주장은 어쩌면 그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에서 오는 게 아닐까. 집을 최대한 안팎과 구별하기 위해 들였던 나의 노력과 대설 한파의 웃풍을 지나며, 조응의 희미한 잔향만이 남아있는 지금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