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내 것 같아요 < 17 >
주민기자가 쓰는 청소년소설
2013-08-01 한지윤
현우가 당장에라도 나갈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앉아, 이 녀석아. 그렇게 순 억지를 쓰니까 밤낮 어른들 속이나 썩이지."
왕순이 일어서려는 현우의 어깨를 눌러 앉히며 말했다. 도대체 무엇이 녀석의 반항심을 불러일으키는지 왕순은 알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안 계신 것도 아니요. 먹고 살 걱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번엔 무슨 말썽을 부린 거야? 말해 봐."
그러나 현우는 대답이 없었다. 침울한 표정으로 때에 절어 검은색이 다 된 벽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네가 언제 속 드러내고 다니는 놈이었냐. 싫으면 관둬. 내 코가 석자나 빠졌는데 남 생각 하게 됐냐. 이왕 왔으니 땡땡이치지 말고 열심히 일이나 해라."
체념한 듯 왕순이 손을 털고 일어서며 말하자 현우도 따라 일어서며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누가 시커먼 수놈들만 사는 집 아니랄까봐 이렇게 어질러놓고 난리야."
현우가 팔을 걷어붙이고 가스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차!"
바닥을 쓸던 왕순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동작을 멈추었다.
"혼비백산 도망 오느라 가스 값을 안 받았잖아."
왕순이 머리를 싸쥐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왕순을 보며 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가서 받아오면 되잖아."
"그게 아니구.."
자초지종을 들은 현우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헬멧을 들며 일어섰다.
"어디 가려구?"
"가스 값 받아와야 할 것 아냐."
"그래, 네가 좀 갔다 와라. 그런데 너 조심해야 한다. 몸을 날렵하게 움직여야할 거야. 그 여자한테 한번 물렸다간 약도 없겠더라. 으이그, 끔찍해.
왕순은 미애의 모습을 떠올리며 소름이 끼치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바쁜 날들이 계속되었다. 새벽5시, 시내버스만 드문드문 다니기 시작하는 한적한 시간에 일어나 빈 가스통에 가스를 채우고 청소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조금 늦게 일어나도 큰 지장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부지런함이 몸에 배인 왕순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하루 종일 뛰어다니게 되었다. 요 몇 달 새에 가스를 쓰는 집이 부쩍 늘어나 두 사람으로는 벅찰 정도로 주문이 밀려들어왔다.
가끔 주문이 뜸해서 짬이 나는 시간이면 아버지의 노기 띤 얼굴, 동생의 어두운 표정이 떠올랐지만, 그때마다 현우는 애써 고개를 흔들며 외면했다.
경우는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놓았다. 현우가 집을 나가고 난 후부터 귀가시간이 늦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적은 식구에 형까지 없으니 그렇잖아도 커다란 집엔 찬바람만 감돌았다. 집안에서 웃음이 사라진 것이 벌써 몇 년째이던가!
한적한 골목을 꺾어들던 경우의 눈에 검은 그림자들이 들어왔다. 길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우던 몇 명의 불량학생들이 가로등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왕순은 어두컴컴한 공터를 건들거리며 걷고 있었다. 비록 서울 시내이긴 했지만 변두리라서 그런지 밤하늘에선 제법 별도 볼 수 있었다. 하루를 쫓기듯이 가스통과 오토바이에 시달리다가도 밤이 되어 가게에서 멀지 않은 공터로 나오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밤은 참 너그러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