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내 것 같아요 < 21 >

청소년소설

2013-08-26     한지윤

그러나 요즘 들어 경우는 형에 대한 따뜻한 감정이 싹트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그건 경우에게 아버지의 참모습이 관찰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형이 아버지에게 실망을 주고 나서 아버지는 경우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말씀과 칭찬이 늘어갔다. 그러나 바로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경우로 하여금 아버지와의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따뜻한 칭찬 한 마디가 건네져 올 때마다 그는 마치 아버지가 팔에 잔뜩 주어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버지가 형 대신 자기를 선택했고 형에 대한 실망과 자신에 대한 기대가 정비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경우는 참을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비로소 형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한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성취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기준을 미리 만들어놓고 자식들이 거기에 맞추어 주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경우는 걸음을 빨리 해서 현우 옆으로 다가갔다. 무슨 말인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 공원만 지나면 바로 집으로 통하는 골목이기 때문이었다.
"형, 집엔 언제 들어 올 거야?"
경우가 불쑥 물었다.
"생각해봐서."
짧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고는 벤치에 앉았다. 경우도 따라 앉으며 비릿하게 고여 오는 침을 뱉었다.
"형은 이기주의자야."
"그럴 수도 있지."
현우가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형은 자기밖에 모르잖아. 집에서 얼마나 걱정하고 계신지 알기나 해?"
경우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 속으로는 아버지와 싸울 수 있는 형의 배짱을 부러워하고 있으면서도 가족으로서 해야 할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우는 그런 동생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릎에 놓인 가방 손잡이에서 삐져나온 실밥을 뜯어대며.
"난 옛날 형의 모습이 좋아. 나한테 공부도 가르쳐주고, 내가 애들한테 맞으면 와서 애들을 혼내주던 형이 말야. 형은 착한 일도 많이 했지. 어른들은 모두 형이 큰 인물이 될 거라고 했잖아. 요즘 어른들은 이상해. 누가 무슨 행동을 하면 그 이유나 과정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결과만 가지고 잘못했다고 낙인을 찍으니 말야. 난 정말 못마땅해. 이번 형 일도 그래. 형이 잘못한 게 뭐가 있어? 불량배들한테서 여학생들을 구해준 게 무슨 죄가 된다고 학교에서 쫓아내기까지 하냔 말야. 난 알아. 형이라서가 아니라 오현우라는 사람이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경우가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현우의 눈엔 그런 말을 하는 동생이 어느새 부쩍 커버린 어른처럼 보였다. 그런 어른스러운 말을 할 만큼 성장한 동생이 대견스러웠다.
"그래. 네가 내 마음을 이렇게 알아주니 고맙구나."
현우가 미소를 지으며 경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오랜만에 감싼 동생의 어깨는 크고 단단했다.
"형, 그만 집으로 들어와. 이렇게 고생하지 말고. 이렇게 도망치는 건 형 스타일이 아니잖아. 정정당당하게 부딪쳐 이겨내야 하지 않아?"
현우는 말없이 먼 곳을 응시하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럴까?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닐까? 그래, 경우 말대로 이렇게 피해 있는 건 떳떳치 못한 일인지도 모르지.'
이대로 아버지나 선생님들 앞에 안 나타나면 어른들은 뭐라고 생각할지 상상해 보았다. 그들은 분명히 손뼉을 치며 말할 것이다. '그것 봐. 그 녀석은 어쩔 수 없는 골칫거리라니까. 탈선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놈이라구.'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