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의 영원한 로망·철새들의 낙원 천수만에서 길을 찾는다

새를 아는 것은 곧 세계와 인생을 아는 것 …

2014-11-27     김세호<홍성조류탐사과학관 연구위원>

새를 아는 것은 곧 세계와 인생을 아는 것…

새들의 낙원-천수만에서 철새들은 남하(南下)하고 또 북상(北上)한다. 오고 가는 그들의 성공적인 먼 여행은 본능이거나, 행운일 것이다. 철새는 날아가고(El Condor Pasa) 텃새는 머문다. 철새들은 천수만에서 인간이 끝내 이룰 수 없었던 영원한 로망, 새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욕망을 연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들은 날 수 있으나 인간은 날 수가 없다.

새들의 낙원 천수만 위를 떼지어 나는 철새들의 비행.

새처럼 날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은 원초적이다. 고대신화에서 새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보편적인 상징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크레타 섬의 미로(迷路)에 갇힌 장인(匠人) 다이달로스(Daedalos)는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붙여 하늘을 나는 날개를 만들어 아들 이카로스(Icaros)에게 준다.

이카로스는 이 날개로 미궁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지만 태양을 향해 하늘 높이 계속 나르다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추락한다.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태양을 향해 날아간 이카로스는 과연 무모하고 어리석기만 한 것인가. 그리스 신화의 비극이 오늘의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무엇인가.

과연 욕망의 절제만을 강조한 것인가. 역설적으로는 높이 난다는 희열과 흥분, 어떤 한계와 금기를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모험과 도전의 정신을 상찬한 것은 아닐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 잉게보르크 바하만(1926~1973)의 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태양을 향해 높이 날아간 이카로스가 날개가 녹기 직전에 고도를 낮추어 지상으로 내려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추락하지 않더라도 계속 비상하려는 인간의 위대한 정신은 영원히 실종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능하다. 그리고 현애살수(懸崖撒手). 천 길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서쪽으로 태백산 바라보니
새들이나 다닐 수 있는
높고 조그마한 길이 있네.
내게 새처럼 날개가 있다면
아미산의 산정(山頂)을
가로질러 끊으며,
날아갈 수 있으련만.
이적선(李謫仙, 701~762),
<촉도난(蜀道難)>


새는 오랜 세월 인간과 함께 이 아름다운 행성, 푸른 지구에서 희로애락을 서로 나누어왔다. 인간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직립동물이 자연의 사냥꾼이었던 수렵과 채취의 시절 이전부터 새는 인간과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차츰 우리 인간이 이룩한 역사와 문화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새는 인간과 직·간접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연의 한 조각으로서, 새와 인간의 관계는 포식과 피식의 생물적 차원을 넘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넓고도 깊다. 태고의 신화나 전설, 고대왕국의 성립과정에서 새는 신비한 상징으로서 또는 유력한 토템으로서 독특한 흔적과 경이적인 유산을 인간에게 남기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새들의 역사와 함께 호흡하면서 동요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의 새들은 선사 시대 전후의 인간이 그린 동굴벽화에서부터 시작해 정복국가의 왕실을 장식한 그림·도자기·병풍·자수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숱한 민담과 노래·무용(舞踊)과 의식(儀式)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미학과 예술을 다채롭게 빛내 왔다.

그 오묘한 진화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살아남아 우리 곁에서 미지의 미래를 향해 약동하고 있다. 새들의 노래로 천수만의 여명과 아침이 시작되면서 먹이를 찾는 새들의 분주함이 더욱 활기에 찬다. 새들은 차가운 공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또 저녁이 되면, 서해안의 장엄한 낙조(落照)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장관을 배경으로 낙조(樂鳥)가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한다.

해가 바다에 지면 천수만과 간월호에 환한 달이 뜨고, 빛나는 별들이 밤하늘을 황홀하게 수놓는다. 사육되지 않는 야생의 새들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기쁨과 건강함을 본다. 동시에 포식과 피식의 먹이사슬,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은 천수만 새들의 세계에도 여지없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새가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인간도 살 수 없다. 생명의 동일성이라는 점에서 새들과 인간은 같다. 우리 인간은 자연의 철없는 아이들로서, 천수만 갯벌과 철새, 생물다양성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어떤 원점(原點)을 보는 기회를 갖는다.

천수만을 오가는 철새를 통해 새와 인간이 결국 하나라는 것을 우리는 겸허한 심정이 되어 배운다. 자연은 위대한 어머니이자 영원한 모성(母性)이며, 인간의 학교가 된다. 천수만에서 우리는 자연의 가르침을 받는 착한 학생이 된다. 하늘을 날고 땅에서 먹이를 찾는 새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천수만을 찾은 큰 고니 떼.

새에 관한 관심과 지식은 가까이는 우리를 환경보전에 참여하게 하고, 멀리로는 자연과 생명의 고귀함을 깨우치게 한다. 우리가 새를 안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와 인생에 대해 안다는 것과 같다. 새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문화의 일부다.

새를 좋아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인생과 역사를 사랑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은 생태계라는 거대한 생존학교의 한 구성원이다.

옛 나라야 흥했거나 망했거나 새는 하늘을 지난다
(故國興亡鳥度空).
누가 알랴, 머뭇거리는 나그네의(誰識周南留滯客)
뜬 구름, 지는 해의 하염없는 뜻을(浮雲落日意無窮).
이중환(李重煥, 1690~1752)

천수만(淺水灣)은 복잡한 해안선으로 이루어진 서해안과 조수 퇴적환경이 발달, 광대한 갯벌(조간대)이 만든 생물다양성의 살아있는 보고(寶庫). 천수만은 수심 10m 내외의 얕은 바다다. 수심이 얕고 작은 섬들과 암초가 많아 대형선박의 출입과 항행은 어렵다. 그러나 천수만은 수많은 야생 철새들이 이곳에서 날아와 서식 또는 월동을 하고 있다.

너른 농경지에는 새의 먹이가 되는 곡식 낟알이 풍부하고, 갈대숲을 비롯한 습지와 수풀은 철새들이 서식하는 좋은 조건이 되었다. 천수만은 매년 300여 종, 40여 만 마리의 철새가 찾는 우리나라 최대의 철새도래지로 이름이 높다.

농경지, 초지, 습지, 소규모 수로가 풍부한 천수만 지역은 새들이 찾는 낙원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논병아리, 가창오리, 청둥오리, 큰기러기, 쇠기러기, 왜가리 등이 주종을 이루고, 황새, 노랑부리저어새 등 국제적인 보호를 받는 희귀종들도 다수 나타난다.

큰기러기, 노랑부리저어새, 왜가리들이 먹이를 먹고, 벌레 한 마리 찾을 수 없는 벌판과 얼음 떠다니는 호수를 우아하게 거닐거나, 겨울의 푸르고 맑은 창공에 뜬 새들을 보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세속에 젖은 마음이 씻긴다는 기분이 든다.

목욕이나 수영을 하고난 후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처럼, 새를 만나는 시간들은 우리 본래의 순수한 마음을 찾는 여로(旅路)가 된다. 천수만의 겨울은 하나의 축복이자 자기정화(自己淨化)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 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그대를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D. 쿠스티스 작사, E. 쿠스티스
(1875~1937) 작곡, <돌아오라 소렌토로(Torna Surrien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