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르게 살라”는 아버지 유훈 따라 걸어온 삶
세상사는이야기-중앙철물점 박용두 대표
“본래 제 고향은 구항입니다. 광천에서 학교를 졸업한 뒤 철물점을 운영하게 됐고 50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하지만 원래 철물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천시장 골목에서 중앙철물점을 운영하고 있는 박용두(84) 대표의 말이다. 한학에 전력하던 아버지는 계룡산에서 스승을 모셔와 박 대표에게 한학을 배우게 했다. 또 박 대표네 집은 농사를 지으며 양조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가정이기도 했다. “춥고 배고픈 것을 모르고 살았었죠. 저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직선적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런 제 성격을 아시고 ‘네 성격에 사회활동을 하다가는 남을 너무 도와주거나 안 될 일을 되게 만들어서 분명히 감옥에 가게 될 것’이라며 사회에 진출하지 말고 가업을 승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업인 농사를 물려받게 됐죠.”
사실 박 대표는 학교를 졸업한 후 친척의 소개로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아버지의 만류로 시골에 남아야 했다. 하지만 박 대표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배움에 대한 열의를 꺾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책은 모두 읽으며 지식의 범위를 넓혀나갔다. “그냥 농사만 짓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집에서 단돈 10원 한 푼도 없이 나와 혼자 힘으로 철물점을 차려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또 ‘모든 일은 체험해봐야 안다’는 신념을 갖고 비록 철물장사를 할지언정 배우고 알 것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50여 년간 풍수지리를 배우며 한학에도 열중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주변에서 풍수지리로 터를 봐 달라는 부탁이 종종 들어오기도 하지만 이미 늙었고, 때가 지났기에 거절하고 있죠.” 박 대표는 지금까지도 부업으로 1000평 농사를 짓고 있다. “말년에 자식들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아직도 농사를 짓는다”는 박 대표는 왕성한 사회활동으로 지금까지 군수나 경찰서장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평생 동안 13개의 감사패를 받았다. “옛날부터 군의원이나 조합장 자리를 부러워하면 ‘내가 우리 아버지 아들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죠. 단, 지역을 위해 봉사활동은 얼마든지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박 대표는 이러한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1971년 새마을지도자를 시작으로 홍성군 바르게살기위원, 분회위원, 사회정화위원 등 봉사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그렇다보니 주변에서 군의원이나 조합장에 출마해보라고 권유를 하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그리고 박 대표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을 추천했고, 실제로 당선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보니 나중에는 ‘광천 중앙철물점이 조합장의 산실’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고 한다. “구항면 협의회장을 65세의 나이로 퇴임하면서 제가 강조한 말이 있습니다. ‘감투라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 감투를 썼으면 물려줄 줄 알아라. 감투를 쓸만치 썼으면 벗을 줄을 알아야지, 쥐고 있으면 사람 꼴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옳고 바르게 살라고 강조하신 것을 따라서 살아온 것이죠.”
박 대표는 슬하에 아들 다섯과 딸 둘, 모두 7남매를 뒀다. 최근에는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게 됐는데, 박 대표는 그동안 아내 이름으로 모아 둔 5000만 원을 자식들에게 전하며 병을 고쳐달라고 말했다. “자립적으로 노후기금을 마련해 필요할 때 쓰려고 했던 것이죠. 아내는 평생 저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에 죽기 전까지는 제가 책임질 겁니다. 그렇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녀들에게 책임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박 대표는 “부모나 자식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자립하는 법을 배우라”면서 “또한 자녀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지 말고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자립정신을 심어주라”고 강조했다. “저는 지난 40여 년간 일기를 매일 써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써 온 일기를 읽으면 제가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 수 있죠. 어제까지 저는 제게 펼쳐진 인생사를 사실 그대로 썼습니다. 물론 오늘도 제 인생의 한 페이지를 써나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