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계보
1592년 임진년부터 7년에 걸친 길고 모진 전란 속에서도 이 충무공은 일기를 쓰셨다. 전제군주 시대에 제왕의 시기 질투로 목숨일 경각에 달렸던 때에도, 모친이 돌아가시고 자식이 죽는 애통 참절함 속에서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하루아침에 졸병도 아닌 백의종군하게 된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일기를 쓰셨다. 그보다 100년 전, 이탈리아 출신 컬럼버스는 머나 먼 바다 건너 에스파냐(스페인)에까지 가서 이사벨라 여왕을 설득한 끝에 망망대해로 선뜻 뛰어들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대륙을 발견한다. 이보다 100년 전, 일개 시골(함흥)출신 무장 이성계는 무슨 힘으로, 어떤 계시로, 홍건적을 물리치고 용맹무쌍한 왜구 아지기발도를 무찌르는 등 동문서주하며 개경의 삼한갑족들을 제치고 근세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는가? 한편 명창 김소희 선생이 가장 아끼던 제자 안향년, 기량이며 미모가 출중했고 성격 좋고 재주가 많아 만인의 연인이었던 그녀는 어찌하여 한창 나이에 세상을 등졌으며, 역시 출중한 미모와 연기력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최진실, 이은주 등은 어인 일로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지고 말았는가? 꽹과리의 전설 최성구 선생에게 배워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과 더불어 ‘사물놀이’로 세상을 들었다 놨던 최고의 스타 미남 상쇠 김용배는, 소련 젊은이의 우상이었던 빅토르 최는, 미국 영화의 신화 제임스 딘은 어이하여 너무도 빨리 세상을 등지게 된 것인가?
전자의 가슴 속에는 ‘희망’이 있었기에 그 모든 어려움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버텨낼 향수가 있었고, 후자의 가슴속엔 ‘절망’이 대망이(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기에 이생에서 더 이상 살아갈 낙이 없게 된 것이다. 얼핏 느끼기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는 위대한 혼들이 전혀 상반된 삶의 모습을 남긴 까닭은 무엇인가? 한 인간의 삶을 제대로 비춰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납득이 가도록 따져본다는 것은 뜻 깊은 일이 될법하고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귀감이 될 것이기에 매달리다보니 지난 복더위를 그럭저럭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안향년 명창이 유부남을 만나지 않았어도, 최진실의 경우도 잘못된 만남이 아니었더라면, 이은주 양 역시 그 지독한 우울증을 만나지 않았었다면, 제임스 딘 또한 이미 딴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여배우 피어 앤제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삶은 전혀 다른, 보다 더 아름답고 풍요롭고 빛나는 인생이 됐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작은 이치를 발견하게 된다. ‘희망’과 ‘절망’ 형제의 부모는 건강한 심신이다. 헌데 똑같은 부모의 자식인데 형제가 어찌 그다지도 천양지차의 상극이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만남’이라는 요술방망이다. 신라 시대의 금척(金尺)이요, 화수분이자, 중동세계의 ‘열려라 참깨(open sesami)’인 ‘만남’. 인간 만사의 가장 훌륭한 성공의 열쇠이면서도 가장 무서운 독이 될 수도 있는 요술단지 ‘만남’. 잘 사용하면 알리바바의 경우처럼 복덩어리가 될 것이요, 잘못 사용하면 그의 형 카심이나 놀부처럼 패가망신하는 게 바로 ‘만남’이리라. 한걸음만 더 나가보자. ‘만남’을 제대로 하려면 어찌해야 되는가? ‘마음의 눈’을 제대로 떠야 한다. 즉, 심안(心眼)이 열려야 하는 것이니,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보자. 알렉산더 대왕도 부케팔로스라는 명마를 만났고, 항우도 오추마라는 명마를 만났으나 이 두 사람 및 그들의 애마가 안게 된 운명은 전혀 다르다. 희극과 비극, 성공과 실패, 위대한 마침과 비참한 최후. 그 까닭은 전자는 서양 학문의 비조로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훌륭한 선생을 만났고, 항우는 사내가 이름 석 자만 쓸 줄 알면 족하다며 공부를 안했으니 파초대원수 한신에게 쫓겨 오강(烏江)에서 자결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릴린 먼로가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를 만난 것은 우정 어린 만남이요, 케네디 대통령 형제와의 만남은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비극적인 만남이었다. 반면에 명배우 로버트 드 니로와 명감독 마틴 스콜세지와의 만남은 빛나는 성과를 가져다 준 기념할 만한 만남이었다. 끝으로 ‘좋은 만남’의 최선책 가운데 하나는 좋은 책을 읽는 것이고, 많은 좋은 것들을 겪어보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