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내몸은 홍양성(洪陽城)에 있었지”

그림으로 만나는 시인 이달(3)

2015-12-24     오천 이 환 영

선조 25년(1592) 임진년 4월 13일, 일본 정예군 30만명의 부산공격으로 도발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 전쟁은 이미 예고된 환난이었다. 간교한 도요토미는 “명(明)을공격할 길을 조선에게 빌린다”는 소위 가도입명(假道入明)을 구실로 조선을 압박하며 집요하게 길을 내어 줄 것을 요구 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파죽지세로 한양을 비록 개성과 평양으로 쳐들어 왔다. 율곡은 9년 전 목숨 건 상소를 선조에게 올린다. “200년 역사의 나라가 2년간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아닙니다. 진실로 나라가 아닙니다.” 이미 나라가 아닌 조선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명(明)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긴채 전쟁의 파국으로 끌려들어 갔다. 우리의 시인 이달은 그때 고향땅 홍양성(洪陽城)에 있었음을 고체풍의 詩 “예전에 만남을 그리워하여 정랑 신설에게 지어주다”에서 확인한다.

“난리가 처음 나던 날을 생각하니 이 내몸은 홍양성에 있었지, 성둘레 수백호 인가에 닭과 개들도 또한 편치 못했지”(憶昔亂離初  身在洪陽城  城邊數百家  鷄犬亦不寧 억석난리초  신재홍양성  성변수백가  계견억불령) 라고 묘사하여 힘없는 백성들이 견뎌야 하는 전쟁의 참상을 극대화 시킨다. 시인은 42구(句)에 달하는 긴 시에서 의병장으로 나가 싸우고 있는 30대의 정랑 신설을 격려하며, 일본군의 무도함을 알리고 종묘사직의 회복을 기원한다.

“그대는 바로 젊은 시절이라 가을 하늘처럼 생쾌 했었지 / 청동에서 군호소리 들리고 의병을 모집하자 모였네 / 병사들은 식량마련 쉽지가 않아 비분강개하며 눈물이 갓끈을 적셨네 / 힘은 작아도 뜻은 굳었건만 시절이 위태로워 일을 이루지 못했지 /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 조야에 곡소리가 들렸지 / 종묘사직이 불타버렸으니 뒷골목 백성들이야 물어 무엇하랴 / 도적의 숫자를 알수가 없어 불에 탄 두 서울만 남았으니 / 들과 언덕에는 피가 흐르고 길에는 시체가 종횡으로 덮였네 / 만백성들이 새처럼 흩어져 도망쳐 숨어 구차하게 살아가네”(이하 생략)

필자는 방대한 시인의 뜻과 정신을 온전히 옮겨 그리기에는 능력이 부족하다. 오히려 詩 스스로 회화의 경지에 서서 대작의 전쟁 기록화를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새처럼 흩어져 구차하게 숨어살고 있는” 백성들의 참혹함을 어찌 붓으로 그려낼 수 있으랴. 다만 그가 사랑한 고향 홍양성(洪陽城)과 홍주의 진산(眞山)인 백월산이 품고 있는 소박한 마을과 사람들 그리고 소소한 풍경을 그려 시의(詩意)를 세우려 노력하였고, 회화의 시적수준에 도달하려는 의취(意趣)를 더하려 애를 썼으나 오히려 오언율시(五言律詩)의 장대한 구도와 숨 막힐 듯 격렬한 시의(詩意)가 그림을 압도함을 감당할 수가 없다. 나라가 아닌 조선의 비통한 역사의 기억이 강물 되어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씻겨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