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재마을

김민수 이장과 나눠보는 역재마을 이야기

2008-07-23     편집국

조선 초 세천역이라고 부르는 역이 있어 역티라고 불렸다.

홍성읍내에서 홍성교육청을 지나 홍동 쪽으로 가자면 고개 하나를 넘게 되는데 그 고개를 역재 또는 역치라 부르고 고개 옆 연못을 역재방죽 또는 역치방죽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고개와 연못을 포함하고 있는 마을이 바로 역재마을이다.
조선 초 세천역이라고 부르는 역이 있었다 해서 역재 또는 역티라고 부르는데 이곳에 있었던 역은 성종 때 지금의 홍동면 세천리로 옮겨 갔다고 한다.
역재마을은 56가구 145명의 주민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마을로 행정구역상 고암1리이고 문헌에 따르면 고려 때는 홍주 고을에 속했었다가 백제 때는 금주군에, 신라 때는 해풍현에 속했었다.조선 초엽엔 홍주군에, 말엽엔 홍주군 주남면의 지역이었고 북사리, 남관리와 주남면, 마구형리, 영암리, 고모리와 죽전리, 역티리, 피목동, 학교리, 하장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고모와 영암의 이름을 따서 고암리라 해서 홍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10월 1일 읍승격에 따라 홍성읍 고암리가 되었다.
역재마을은 뒤로 삼정산이 있고 마구형(읍내)쪽 마을입구에는 역재방죽이란 연못이 있는 마을로 기찻길이 지나가 먼 산에서 바라보면 예쁜 엽서의 표지에서나 볼 듯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풍수지리상 삼정산은 소가 앉아 있는 형국이고 역재방죽은 소의 구유 형국이라 하여 방죽 자리가 명당이고 장군이 나올 터라 한다. 역재마을은 원래 물이 펑펑 솟을 정도로 물이 잘 나는 마을이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명당 터인 지금의 방죽 자리에 농수 목적이란 핑계로 일장기 모양으로 방죽을 만든 것이다. 방죽의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의 의문점을 풀 수 있었다. 물이 풍부한 것은 삼정산으로도 알 수 있다. 우물이 3개가 있어 삼정산인데 예전엔 물이 흘러 넘칠 정도로 솟았다고 한다. 지금은 관리가 안 돼 2개는 형태만 남아있단다. 원래 역재방죽도 2500평 정도의 규모에 물이 가득했는데 홍수 때 제방이 무너져 작아진 상태라 한다.

◆14년째 마을 일을 하면서 힘든 적이 없다는 김민수 이장
홍성역 역전 앞뜰까지 농사터가 많았지만 외지인들이 사들이면서 많은 농사터가 없어져 아쉽다는 말을 하는 김민수 이장. 역재마을에서 처음으로 과수농사를 시작한 김민수 이장은 지금은 3농가만이 과수농사를 하지만 한땐 14농가가 과수농사를 했다고 한다. 역재마을에선 과수농사의 선구자 역할을 한 장본인이 김민수 이장이다.
“9년전 신식 회관을 지었는데 공교롭게도 마을입구인 문화원 입구, 청양통 사거리, 홍동방향입구에서 정확히 550m씩 떨어진 거리다. 마을회관이 정중앙에 있으니 정신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고 주민들이 모이기도 좋은 편리성이 있다. 그리고 마을입구 3곳에 표석을 세웠는데 당시 800만원이란 거금이 들었는데 주민들이 십시일반 각출하고 천안 전씨에서 한곳에 표석을 부담하여 오히려 돈이 남았다. 이렇듯 마을주민들은 마을일에 적극적이다”
김민수 이장은 마을이야기를 하면서 꼭 얘기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서 “마을에 가장 큰 행사가 있는데 바로 고 이동춘씨의 제삿날이다. 어렵게만 사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마을에 논 650평을 희사하셨다. 매해 2월엔 그 분의 넋을 기리고 융숭하게 제사를 지내드리고 있다. 그 논은 마을공동재산으로 남아있고 일부는 남부순환로 건설시 보상을 받아 그 돈으로 좋은 터에 이장을 해드렸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김민수 이장을 보며 고 이동춘씨의 그리움과 고마움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면서 “젊은 이장이라 무시하지 않고 잘 따라주신 마을 어르신들에게 감사드리며 해마다 20만원씩 지원해주시는 역재재경회와 역재재경회 회장인 전흥정씨에게 깊은 감사드린다. 또한 마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노인회, 청년회, 부녀회 모든 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마을일은 봉사의 맘으로 하기 때문에 전혀 힘들지 않고 보람과 기쁨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