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위해 바친 ‘열아홉 청춘’
6·25한국전쟁 66주년 기념 특별 인터뷰
무공수훈자회 홍성군지회 이덕윤 씨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자원입대
열아홉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펜 대신 총을 들어야 했던 삶. 충절의 고장 홍주 사람답게 국가를 위해 자원입대를 했던 학도병은 어느새 여든 다섯의 노신사가 됐다. 홍성읍에 거주하는 이덕윤(85) 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제가 열여덟이 되는 해였던 1950년 6월 25일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우리나라는 점차 초토화가 됐죠. 그러던 중 저는 좌익들이 양민을 학살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됐고, 수복 후 1·4후퇴가 일어나던 시기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쳐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열아홉이라는 나이에 자원입대를 하게 됐습니다.”
6학년제를 시행하던 당시 5학년으로 1년 후 졸업을 앞뒀던 이 씨는 학업을 보류한 채 무작정 나라를 위해 전장으로 향했다. 당시 이 씨와 같이 학도병으로 나선 이들은 8사단 21연대로 모여들었고 그 수는 700여 명이었다. 자원입대 학도병들은 군사훈련을 받고 각 부대로 배치됐다. 일부는 8사단 사단본부로 배속됐고, 일부는 21연대에 배속됐으며 이 씨는 21연대로 부임하게 됐다.
“8사단에서 전투에 임하며 겨울과 여름, 두 차례에 걸쳐 공비를 토벌했습니다. 인제 북방과 양구 북방, 금화 북방 등 3개 중부전선에서만 휴전이 될 때까지 전투에 임했죠. 전투는 정말 치열했습니다.” 중공군의 벙커 공격으로 무참히 파묻혔던 이 씨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휴전이 되고난 1953년 9월 21일, 이 씨는 화랑훈장을 수여받으며 전역을 하게 됐다. 전역을 하자마자 고향인 홍성으로 돌아왔는데, 이 씨를 본 가족들은 기뻐하기보다 놀라운 표정이 역력했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 중공군이 벙커를 공격했을 때 이미 죽은 것으로 판정돼 전사통지서가 집에 날아왔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슬퍼하며 제사까지 지냈는데, 죽었다던 아들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으니, 어머니께서도 귀신이 왔나 싶어 어안이 벙벙하셨겠죠.” 열아홉의 청춘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지만,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이 씨의 뜨거운 마음은 아직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월남전에 참전해 전공을 세워 인헌무공훈장을 수여받은 무공수훈자회 홍성군지회 최종수 사무국장도 “이 씨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뜨거운 열정은 모든 이들이 본받을만하다”고 추켜세웠다. 이 씨는 전쟁을 겪지 못한 세대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전쟁의 비극은 절대 다시 일어나선 안 됩니다. 무공수훈자회에서 매년 안보사진전을 개최하는 이유도 또 다시 전쟁의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섭니다. 특히 최근에는 6·25전쟁을 남한이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쟁을 직접 겪은 저희 세대가 듣기엔 말도 안 되는 이야깁니다. 한민족이 분단이 되는 이러한 큰 아픔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다함께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