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25>
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그래, 젊음은 아름다운거야
“꽤 까다로운 아가씨군, 그래. 이름은 한훈찬, 나이 40세,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광화문동. 그 정도면 되겠소?”
사나이는 고급 안경을 왼편 손가락으로 치켜 올리며 말했다. 입고 있는 더블 단추의 신사복이 꽤 값나가는 고급 옷으로 보였다.
“직업은요?”
“증권업.”
“브로치를 사 준 동기는요?”
“직업은요?”
“증권업.”
“브로치를 사 준 동기는요?”
“심문을 받는 것 같군, 그래. 하긴 그대가 아직 발랄한 아가씨니까……”
소영이는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 보았다. 한훈찬 이라고 자기 이름을 말한 이 사나이도 소영이를 쳐다보았다.
“별로 신용할 수는 없지만 함께 가기로 하죠.”
“생각 잘 했어요.”
“아가씨에 대해서도 좀 얘기해 줄 수 없을까? 어떤 여자인가……”
“웨스트, 바스트 그리고 히프의 치수를 말하면 될까요?”
“흠……그것도 좋지.”
“체중이 4킬로에 신장이 60센치예요.”
“뭣이라구?”
“태어났을 때 말이예요. 제가……”
“하……4킬로 갓난 아이라면 밉살스러울 정도로 큰데.”
“그 비율로 커지진 않았을 거예요……”
“물론 그렇지, 키 크기며 몸매가 안성맞춤인데……뭐 하는 아가씨?”
“대학 2학년생 이예요. 재수, 낙제 같은 건 하지 않은……”
“그래”
소영이가 이 낯선 사나이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택시는 시내의 혼잡한 거리를 벗어나 박달강을 건넜다. 저녁 노을이 지고 있었으므로 박달산의 윤곽이 더 뚜렷이 보였다.
이윽고 발달산 온천의 중심지에서 조금 외진 곳으로 도착했을 때, 여관들의 현관에 달려 있는 외등에는 불들이 켜지고 있었다. 울창한 대나무 숲에서 잎사귀의 마찰음이 저녁바람에 시원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훈찬이라는 사나이는 그 때부터 이상스럽게도 묵묵히 말이 없어, 무엇을 음모하고 있는지 소영이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그대로 되돌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었지만 어떻든 비프스텍 이나 먹고 돌아가자고 그녀는 결심하고 있었다. 안내된 곳은 자그만 외딴 집이었다. 한훈찬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장 없어?’ 하고 자연스럽게 소리치고 안내된 방으로 들어가 앉자 곧 바깥으로 사라진 뒤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소영이는 창 너머 무성한 관상목을 바라보며 이 외딴 곳의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모든 것이 진기한 듯 돌아보았다.
심부름하는 여자가 엽차를 가져다 놓고 돌아가더니 잠시 후 욕의와 까운을 가져왔다.
“어머나? 그런 것 필요 없는데요?”
소영이가 놀라며 말했다.
“이 곳에 비프스텍 먹으러 온 걸요.”
“어머, 그랬어요? 그렇지만 어차피 오셨으니까 샤워라도 하시고,
호호호……“
소영이는 화가 치밀어 올랐고 그 여자는 그것을 그대로 놓아 둔 채 나가버렸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때 소영이는 무언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옆에 있는 사잇문을 빠끔히 열어 보았다. 과연 그 방에는 솜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 이부자리 한 채와 두 개의 베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빨간 비로드의 커텐을 통해 뚫고 들어오는 불투명한 빛으로 더욱 음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런 곳이 그런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소영이는 새삼스럽게 혐오감이 가슴에 가득 치밀어 올랐다. 여기에서 저 사나이에게 물어 뜯긴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위험, 아찔하다. 목욕을 하고 비프스텍을 먹고 그리고 나서, 그것이 문제다. 비프스텍만을 먹고 슬쩍 빠져 도망칠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소영이는 긴장이 되고 화도 났지만 배가 고파옴을 느꼈다.
그 때 사나이가 들어왔다.
“주방장한테 잘 부탁해서 최고급 비프스텍을 주문했지.”
“그래요?”
무엇을 주문하고 무슨 음모를 꾸미고 왔는지 알 수 없는 노릇 이었다. 소영이는 사나이를 마음속으로는 매섭게 쏘아 보았지만,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샤워 좀 해야지?”
“싫어요, 전, 전 불결한 걸 아주 좋아하니까요.”
“그래요?”
“그럼 나 혼자서 한바탕 목욕을 하고 나오지. 기다려주겠소?”
“좋아요. 어서 하시고 오세요.”
그는 요란하게 슬리퍼 소리를 내면서 욕실로 사라졌다.
몇 분쯤 지났을까, 소영이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 깜빡 잠이 들었다. 설핏 잠에서 깨어나자 이런 지경에서도 잠을 자는 대담함에 소영이는 그녀 자신도 놀랐다. 테이블 건너편에는 한훈찬이 욕탕을 다녀와 상기된 얼굴에 양복을 단정히 차려 입고 앉아 있었다. 귀밑머리에 희끗희끗 백발이 띄는 것이 소영이의 눈에 거슬렸다.
“잠 잔 게 아닌가?”
“네. 배가 고파 이젠 지쳐 버렸는걸요.”
“식사는 벌써 되어 있는데, 아가씨가 일어나는 걸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룸 전화를 걸어 식사 독촉을 하고 있는 그의 등 뒤로 보이는 창밖의 하늘은 이젠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계속>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