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41>

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2018-08-29     한지윤

교복을 입은 딸아이는 옆의 빈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울고 있었는지 한 손엔 구겨진 손수건을 꼭 쥐고 있었다.
“이름이 뭐라고 하지?”
한 박사는 곁에 나란히 앉으면서 물었다.
“고유미입니다.”
한 박사의 물음에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영여고예요.”
“학생이 오는 것을 나는 기다리고 있었어.”
유미는 고개를 숙인 채다.
“동생을 낳았어……”
유미는 놀란 듯이 고개를 들었으나 눈물이 가득한 눈을 보이기가 싫어서인지 고개를 이내 떨구었다.
“아기 보았지?”
대답이 없었다.

“예쁜 아기야. 곧 누나, 누나하고 따를 거야. 학교에 가게 되면 숙제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가르쳐 주고…… 이 아이가 커서…… 아, 그건 그렇고 학생 아빠는 무얼 하셨지?”
“조선소에 계셨어요.”
옆에 있던 딸의 어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그럼, 아빠와 같은 일을 할런지도 모르지. 큰 배를 만든다는 건…… 중요한 일이지. 지금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아서 식량도, 목재도, 기름도 모두 외국에서 수입해 오거든. 우리가 지금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입고 하는 것은 모두 누군가가 그런 배로 외국에서 수입해 오기 때문이지. 지금 이 아이도 그런 일을 할지도 모르잖아.”한 박사는 지금 이 여고생과 갓난아이의 아버지가 같은 사람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앗차 싶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학생. 어머니는 학생에게 미안하다고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느냐고 의논해 왔어. 학생은 어떻게 생각하지?”
유미는 계속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이도 역시 낳은 엄마가 중요해요. 학생만이 엄마를 독점하지 않아도 되잖아. 아이에게도 엄마이니까. 내 말 알겠어?”
대답은 없었으나 유미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한 번 더 꼭 쥐었다.
“엄마가 입을 잠옷, 학생이 가지고 왔어? 비누랑 칫솔, 수건 등……”
“네. 전화했더니 챙겨 가지고 왔어요.”
“아이 이야기도 전화로 했습니까?”
“아뇨. 지금 여기서 처음 했어요.”
“그럼, 조금은 쇼크를 받았겠군. 할 수 없지. 학생도 어른이 되면 알게 돼요. 엄마는 아빠가 있으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잖아. 혼자 살고 있으니 역시 외로운 거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해서 나쁠 것은 없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심정은 여자라면 다 갖게 되는 거야. 학생도 커서 어른이 되면 그 심정 알게 될 거야.
역시 아무 대답이 없었다.

“따님이 사정을 이해해 준다면 아주머니도 좀 마음이 편하겠는데.”
한 박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네. 그래도 역시…… 이미 저질러진 일이지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부끄럽기도 해서요. 시댁 친척들도 있고, 지금 직장도 아이가 있으면……”
산모는 말끝을 흐렸다.
“우리 병원에서는 아이를 맡을 수는 없으나 정 그런 사정이라면 내가 양자를 줄 곳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그 때까진 기르시길 바랍니다.”
박연옥 여사의 이야기가 생각나서인지 한 박사는 자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친절하게 잘 말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때까지도 키우기가 어려워요?”
산모가 생각에 잠겨 있는 표정을 하고 있기에 한 박사는 다시,
“아주머니가 낳은 아이가 아닙니까? 키울 수 없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주위 사람들이 알면 곤란해서요……”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아주머니가 잠시라도 이 아이를 키워 줄 사람을 찾아보세요. 나도 양자 줄 곳을 찾아보겠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됩니까? 강아지 새끼를 주는 것도 아닌데. 상대를 골라야 되잖아요.”

“그 사람은 자기가 낳은 것으로 해 줄까요?”
“그렇게는 안 될걸요? 그건 법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일단 아주머니 호적에 올렸다가 정식으로 양자수속을 취해야 되지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의사선생님의 주소를 알 수 없을까요? 지금이라도 데리고 가면 다른 사람이 낳은 것으로 해 줄지 모르지 않아요.”
“지금은 안 돼요. 그 사람은 법에 걸려서 꼼짝도 못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낳을 걸 그랬나 봐……”
“집에서 낳아 죽이려고?”
“알았으면 그럴지라도……”
옆에 있던 여고생 유미는 소리를 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때요. 그보단 두서너 달 키우다가 양자로 주면 내가 꼭 좋은 분을 찾아 볼 테니까요. 그게 아이에게도 좋을 겁니다. 좀 안 된 말이지만 오히려 아주머니 댁에서 성장하는 것보다 더 좋을지 몰라요. 그러니 정식으로 양자로 보내도록 해요. 그 동안이라도 주위 사람들의 눈이 두렵거든 누구에게 맡겨서 키우도록 하시고.”
“그래도…… 호적이…… 호적에 남으니 딸애의 결혼에도 지장이 있을 거고 시댁에서도 그대로 가만있겠어요? 호적에 올릴 정도라면 차라리 키우죠.”
“정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은 아주머니가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박사는 조금 화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죽여서는 안 돼요! 내가 알고 있으니깐. 그런 짓은 절대로 통하지 않을 거예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