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낙조

2019-08-16     이은련 작가

어느 때 부터인가 바다를 좋아하게 되었다. 먼 바다에서부터 굽이치는 물결, 발밑에서 하야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 모래와 자갈이 경쾌하게 뒹구는 소리가 종종 환상에 젖어들게 되었다.

예전에는 맹목적으로 자주 바닷가 풍경을 즐겼지만, 그 정도로는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 같아서 아쉬움이 남았다. ‘저 바다와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는 없을까?’ 궁리한 끝에 바다낚시를 시작하였다. 낚시를 하면서부터 바다는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다가 그리우면 낚시가방을 들고 찾아갔다. 그 때마다 바다는 칭얼대면서 나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노라면, 파도는 먼 바다에서 있었던 이야기와 전설들을 속삭이곤 한다. 그 중에는 나의 추억이 깃든 이야기도 회상시켜 주기도 한다.

오랫동안 서예에 침잠했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서예가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서예를 비롯한 예술 활동에 대하여 스스로 회의감에 젖게 되었다.  그 돌파구가 낚시였다. 한창 낚시하는 재미에 쑥 빠져 지냈지만, 시나브로 자신에게 허무라는 구덩이가 깊게 파여져 가는 것을 인지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마침 즐겨 입던 흰 바지가 바래지고 있었다. 더 입자니 남들에게 추해 보일 것 같고, 버리기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했다. 그 때 지인이 천연염색을 하고 있어서 찾아갔다. 이왕이면 내 마음에 맞게 만들기 위해서 지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손수 염색 작업을 하였다. 그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이후로 천연염색의 오묘한 색감에 도취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낚시와 천연염색은 나를 꽉 채워주었다. 특히 황해 바닷가에서 종종 만나는 낙조는 내 인생의 파노라마를 돌리는 듯이 깊은 감회에 빠져들게 만든다.

‘인생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한 것처럼 산골짜기를 떠난 물은 되돌아갈 수 없다. 종국에는 바다에 이르러 산비탈을 지나온 이야기, 냇물이 되어 마을 모퉁이를 돌아온 이야기, 넓은 들녘을 거친 강물 이야기들이 여러 빛깔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오늘도 색동저고리처럼 반짝이는 그 이야기들을 담아 와서 내 화폭에 천연염색을 한다.


이은련 작가
충남문화예술상 수상,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대한민국전통미술대전 우수상, 충남미술대전 특선, 홍성군 농업농촌식품산업정책 심의위원회 위원(현재), 충남서예가협회 회원, 충청남도 기술명인(천연염색), 손끝세상 강사, 순빛공방(천연염색)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