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고, 귀 열고, 치우치지 않고, 편 가르지 않고…

2011-01-01     한관우 발행인

 


희망찬 신묘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벅찬 감격과 새로운 희망으로 힘차게 홍주신문은 내일을 향한 비전을 지향하겠습니다. 두 살배기 지역 언론에 보내주시는 뜨거운 관심과 사랑에 진심으로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홍성과 홍성사람들의 희망과 행복, 비전을 제시하여 발전지향점을 향한 가치지향의 창간정신을 실천할 것입니다. '새 충남도청시대 희망언론, 독립신문'의 실현에 주주, 평생독자, 후원회원, 애독자, 광고협찬 등으로 함께 동행하는 홍주신문 가족들과 함께 신뢰와 소통, 진실과 공감의 파릇한 새싹을 튼실하게 키워나가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정론정도(正論正道)의 길을 따라 걷겠습니다.

'신문은 편집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신문에서 편집이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독자들은 신문지면을 확실한 사실이나 진실 그 자체로 믿고 있습니다. 기자가 자신의 이름을 달고 기사를 쓰면 독자들은 그것이 사실인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현실과 신문지면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뒤틀림이나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왜곡의 폭을 얼마나 줄여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왜곡을 줄이려는 노력과 의도적 왜곡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적 왜곡은 독자들이 편집과 기사의 행간을 제대로 읽는다면 금방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의도적 왜곡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때에는 진실과 신뢰는 무너질 것이며, 특정신문의 편견이 녹아든 보도를 진실인 것처럼 그대로 믿게 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신문에서의 왜곡과 뒤틀림, 전형적인 추측과 예단보도는 외면적․형식적으로는 성공적일지는 몰라도 내면적․본질적으로는 분명히 실패라는 사실을 현명한 독자들은 냉철하게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잣집에서 머슴을 살며 돈을 번 돌쇠는 아무리 돈을 벌어도 돌쇠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신문의 역사에서 대표적인 왜곡과 뒤틀림의 예를 든다면 젊은 층에게는 옛이야기겠지만 1979년 10․26으로 이어진 1980년 봄, 전국의 대학에서는 불법화됐던 총학생회 조직이 부활했습니다. 여기에 총학생회장 선거가 국민들의 민주주의 요구와 맞물려 봇물을 이루면서 5월에는 서울역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됐습니다. 또 1987년 당시에는 민주화운동의 절정을 치달은 박종철 고문․살해 은폐사건이 터졌습니다. 하지만 백지광고와 빈 줄 기사가 등장했던 시절, 이러한 사건은 신문의 사회면 1단 기사로 처리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알린 것은, 당시 지하철에서 신문을 팔던 소년들이었습니다. 기자들이 쓴 기사는 1단 기사로 축소됐지만 여기에 빨간 매직펜으 굵게 표시를 해 '특종이요'를 외치는 일은 신문팔이 소년들의 몫이었습니다. 이들의 특종 외침은 판매전략 이기도 했지만, 1단짜리 기사의 진실성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내면적․본질적인 면에서는 전면기사나 탑 기사보다도 파급효과와 위력이 더했던 성공이었습니다. 결국 올곧은 진실보도와 신뢰가치의 판단은 독자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진리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농민과 서민들의 소소함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삶의 애환을 풀어내는 지역 언론의 진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역할과 기능, 사명감이 더 큰 것입니다.

언론은 언론 자신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못견뎌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비판은 언론 자신의 몫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감수하지 않는 언론은 결국 오만해지기 마련입니다. 결국 그 오만은 자신을 스스로 파멸시키는 첩경이 되는 원인이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사물과 인간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언론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비전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언론은 인간사회에 상처를 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등 서구의 언론도 한 사회를 어떤 특정한 일방적 방향으로 세뇌시키려는 강한 욕구와 함께 기득권 세력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사례가 다반사라고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사상의 차이를 매도의 대상으로는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식사회의 언론논쟁은 언론의 장, 그 자체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한 기자의 고백은 우리 언론계의 현주소이며, 실상의 단면입니다. 언론계의 한 선배가 있는데 거의 천재로 꼽히고 있었습니다. 담당하는 분야에서의 전문지식뿐만 아니라 출입처 사람들의 인간관계까지 줄줄이 입력돼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언론계 선배는 언제부턴가 기사를 안 쓰고 있다고 합니다. 못 쓰는 것이 아니라 안 쓰는 것인데, 너무 아는 것이 많아서 아무것도 섣불리 쓸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쓰려고 하니 저것이 걸리고, 저렇게 쓸려고 하니 이것이 걸리고 해서 아예 기사를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성찰이 없는 유능한 기자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치열하게 올바르려고 애쓰는 기자, 그래서 아예 기사를 못 쓰는 그 선배기자를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랍니다. 하지만 기자라는 직업도 소위 의사처럼 가끔 오진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오진의 확률을 줄여나가는 과정은 연륜과 비례하겠지만 본질은 기자의 양심일 것입니다.

기자하면 딱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건 현장을 바쁘게 뛰어다니며 취재하는 모습, 때론 마감시간에 쫓기며 분주한 생활을 하는 모습 등일 것입니다. 이러한 기자들의 정신, 즉 생활방식, 가치관, 태도 등을 말하는 것이 바로 '기자정신'일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들은 종종 '기자정신을 발휘하자'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일까요. 그만큼 기자들의 정신을 일반인들이 배우고, 따라할 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기자들의 정신에서 가장 배울만한 것을 하나만 꼽는다면 '희생정신'일 것입니다. 지금의 기자들도 그렇지만 특히 예전의 기자들은 자신들이 기자라는 직업으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월급은 쥐꼬리만 하고,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신문사 혹은 현장이나 출입처에 있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자녀들을 보러가는 것보다는 뉴스와 관련된 취재원이나 정치인들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렇게 기자들은 자신들의 맡은 사명을 위해, 또 공익을 위해 가족을 희생했을 뿐만 아니라 때론 '자기 자신'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홍주일보, 홍주신문의 기자들도 이러한 정신을 실천하면서 언제나 눈 뜨고, 귀 열고 민심의 진실을 올바로 읽으며 변화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서 치우치지 않고, 편 가르지 않고, 독자들과 함께 군민들의 한가운데에서 신뢰와 소통, 진실과 공감의 반듯한 중심에서 '기자정신'을 실천하며 언론의 길을 걷겠습니다. 특히 천년 홍주의 역사는 결코 왜곡하거나 돈으로 살수 없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천년 홍성의 희망역사를 일구는 일이야말로 군민들과 홍주신문 가족들 모두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여러 가지 부족함에도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는 군민과 출향인, 주주와 애독자, 광고주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새해 인사를 올립니다. 홍주신문 가족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꼭 소원성취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