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귀가 두 개, 입이 한 개인 이유 1부
인간은 귀가 두 개, 입이 한 개인 이유
우리 인간에게는 귀가 2개, 입이 1개 있다. 우주만물을 창조한 조물주의 섭리 중에서 귀와 입의 개수만큼 신기한 것은 없다. 조물주는 어떤 이유에서 인간의 귀를 2개, 입을 1개만 만들었을까? 만약 그 반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져보지만, 정답 찾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다만, 조물주께서는 ‘남의 말은 가급적 많이 듣고, 자신의 말은 최대한 적게 하라!’는 뜻에서 2개의 귀와 1개의 입을 만든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을 해볼 뿐이다.
≪성경≫을 보면, 갈릴리 호수와 사해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갈릴리 호수는 그곳으로 유입되는 강물과 그곳에서 흘러나가는 강물이 공존하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뛰어노는 생명의 젖줄이 될 수 있었다. 반면, 사해는 그곳으로 유입되는 강물만 있고 흘러나가는 강물이 없다. 그런데 고인 물은 반드시 썩게 마련이다. 강물의 유출이 차단된 사해는 이제 생물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호수로 변했다.
그런 의미에서 갈릴리 호수가 귀의 메타포라면, 사해는 입의 메타포다. 즉 인간의 귀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지 않는 이유는, 추악한 말은 한귀로 듣고 다른 한귀로 흘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입에서 구취가 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내뱉은 사악한 말과 남에 대한 나쁜 감정으로 가득 찬 자신의 말이 입안에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독소를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듣기’만 잘해도 크게 성공한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것이 있다. 보릿고개가 일상이었던 옛날의 천 냥은 지금 돈 1,000원과 비교할 수 없다. 모르긴 해도 약 1,000만원 정도의 화폐가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마디 말로 1,000만원의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얘기는 말이 지니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세치 혀를 잘 활용해서 입신양명을 한 인물과 그것을 잘못 놀려 멸문지화를 당한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역사적 인물을 다룬 책이나 리더십 책들도 ‘말言’이 초래하는 불행, 즉 설화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말과 관련된 한자식 표현을 보면, ‘듣기’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일례로 성인을 의미하는 ‘성(聖)’자는 귀(耳) + 입(口) + 선비(士)의 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먼저 듣고 나중에 자기 생각을 말하는 선비’가 곧 성인임을 시사한다. 또 조직을 이끄는 리더Leader의 첫 자인 L자도 혹시 ‘듣기’를 뜻하는 Listening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청각장애로 남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언어장애를 갖고 있다. 인간의 귀와 입은 그처럼 오묘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듣기(귀)’와 ‘말하기(입)’는 어느 것이 먼저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영어회화를 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금방 도출된다. 미국인이 하는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만 비로소 말문이 트인다. 그것을 보더라도 ‘듣기’가 ‘말하기’보다 우선이다. 그 논리는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실례로 ‘올해의 자동차 판매 왕’으로 뽑힌 사람이나 최고의 보험수주실적을 올린 ‘올해의 보험 왕’들이 털어놓는 성공비결은 의외로 단순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저는 자동차(보험)의 성능, 가격, 할부조건 등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고객이 하는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고객과 같은 기분을 느끼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고객의 말을 경청해주니까, 기분이 고조된 고객께서 그냥 계약을 해주시던데요.”라는 말을 털어 놓는다. 이것을 보면, 어떤 비즈니스든지 돈을 갖고 있는 고객이 감동을 받으면 만사가 오케이OK다.
경청이 화자(말하는 사람)를 기쁘게 만드는 이유는, 칠정(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을 의미함)을 주관하는 인간의 두뇌가 그렇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화자는 언제나 주인공으로 대접받는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남의 말을 듣는 입장이 되면, 자신이 화자보다 한수 아래인 사람이라는 열등의식을 갖는다. 우리 사회가 교수나 교사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여주는 것도, 이들이 학생들 앞에서 얘기하는 화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교수나 교사를 진심으로 존경하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라는 말이 그것을 단적으로 대변해준다.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속성은 일상적인 대화, 노래방, 토론장, 심지어는 국회의사당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그것을 내려놓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말을 하고 있는데 타인이 그 말을 가로막거나 말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면 험악한 어투로 반격한다. 우리는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말을 가로막거나 자신이 속한 정당의 당론을 사정없이 비트는 다른 당 의원들과 심한 언쟁을 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숱하게 보아왔다. 요즈음에는 YTN의 돌발영상코너가 말을 놓고 벌이는 국회의원들의 이종격투기(?) 모습을 ‘말과 말씀’이라는 주제로 생생하게 방영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