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항일의병 일으킨 홍주 인물 ‘의헌공 이광윤’
홍성군·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 세미나 열고 본격 역사고증 나서
2011-04-29 김혜동 기자
임진왜란 당시 홍성에서 향병을 창의해 활약하다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헌공 이광윤에 대한 세미나가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 주관으로 지난 26일 홍성문화원 1층에서 열렸다. 이날 세미나에는 이필수 충남도 복지환경국장, 이문원 전 독립기념관장, 김석환 군수, 최종돈 홍주향토문화연구회장, 변평섭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등의 내빈과 여주이씨 문중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석린 충북대 교수, 서흥석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오석민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박물관장의 발표와 송운호 계룡공업고등학교 교사, 김경수 청운대 교수의 지정토론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변평섭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은 개회사를 통해 “홍성군이 추진하고 있는 인물찾기의 일환으로 의헌공 이광윤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며, “이러한 연구는 국가적인 차원보다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홍성군의 역사인물찾기 운동은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의미있는 사업”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김석환 군수는 “그동안 의헌공의 업적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고증이 미흡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 한다”며, “이번 세미나를 통해 이광윤의 업적을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고 선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길 소망 한다”는 내용의 환영사를 전했다.
서흥석 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이광윤의 직계 후손 가운데 장남 이대준 가계의 17세기 인물들은 대체로 음직을 통해 관직에 진출했고, 18세기의 후손들은 문과를 통해 관직에 진출해 청요직을 두루 지냈고 품계 또한 정 3품 당상 이상으로 높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대 국왕의 치적을 기록한 『선묘보감』에 이광윤의 성이 ‘이(李)’가 아닌 ‘조(趙)’로 잘못 표기되자 후손들의 끈질긴 상소 끝에 50년 만에 수정되었다는 기록도 발견됐다. 서흥석 연구원은 “이광윤이 임진왜란 이후에 낮은 증직을 받았기에 후손들의 추증에 대한 요구가 계속됐다”고 밝히며, “후손들의 노력으로 정조에 이르러 증직과 함께 증시의 은전이 내리게 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특히 장곡면 옥계리 산 77번지에 위치한 이광윤의 묘역은 1977년 7월 4일자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 17호로 지정된바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로 기본적인 정비가 이루어졌고, 보조금을 받아 충효사라는 재실도 건립된 상태이다. 오석민 박물관장은 “현재로는 추가적인 정비의 필요성은 없어 보인다”며, “다만 원래 재실로 쓰던 건물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정비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 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오 관장은 “이광윤의 정려 또한 묘소와 함께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므로 묘역과 함께 추가 지정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입향조 이하 4대에 걸친 묘역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만큼 방문객들의 편의를 고려해 이광윤의 묘소를 포함, 옥계리 여주 이씨 선영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도록 홍성군 옥계리 묘역 일원과 청양군 방한리 생가터와 녹정터 등을 함께 표기한 안내판 건립을 건의하기도 했다.
발표 이후 진행된 종합토론에서 송운호 계룡공업고등학교 교사는 ‘임진왜란기 이광윤의 향병창의 활동’에 대해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이광윤이 홍주지역에서 의병진을 구성한 이유, △의병활동의 근간이 되는 군량과 무기 확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배경, △임란이후 공신책록에서 제외된 이유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홍성군이 추진하는 ‘홍주역사인물찾기’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번 세미나는 의헌공 이광윤의 항일의병활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토론으로 보다 진일보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이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관계자는 “현재로써 이광윤에 대한 사료는 지극히 부족한 상태”라고 밝히며, “지속적인 사료발굴을 통해 심도 있는 연구를 이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