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이응노 예술혼, 홍성에서 활짝 피다
이응노 생가기념관, 홍북면 중계리에 오는 8일 개관
2011-11-03 김혜동 기자
국내보다 세계가 먼저 인정한 홍성이 낳은 화가, 고암 이응노. 한국화의 독창적인 재해석, 문자 추상, 서예적 추상으로 대변되는 고암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오는 8일 개관을 앞두고 있다.
당일 개관식은 오카리나 연주, 현악단의 3중주, 군립합창단 등의 식전공연을 시작으로 명예군민증 수여, 고암미술 실기대회 수상자 시상 등과 더불어 전 문화재청장이자 이응노 기념관의 개관준비위원장을 맡았던 유홍준 교수의 ‘내가 아는 고암 이응노의 생애와 미술’이라는 주제로 특강이 진행될 예정이다.
개관전에서는 이응노 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350여점에 달하는 고암의 유품과 작품 중 선별된 100여점의 유·작품이 먼저 공개된다. 세부적인 전시동선을 살펴보면 총 4전시실 중 1전시실은 고암의 연대기, 2·3전시실에서는 도불 전·후의 작품, 4전시실은 유홍준 교수를 비롯한 국내 화랑가에서 기증한 기증작들로 채워진다.
동양의 미학으로 서양의 논리를 다룬 화가, 고암
전시의 전반적인 기획은 김학량 교수(동덕여대)가 맡았다. 김학량 교수는 “고암은 몸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는, 몹시 부지런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선배들의 얘기를 빌리자면 고암은 새벽부터 자기 직전까지 그림을 그리고, 만드는 일을 쉬지 않았다. 재료나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쉼 없이 그림을 그리고 무엇이라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러한 행동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몸으로 태어난 천상 예술가였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고암은 낯설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월했던 사람이었다. 예술가들이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과감함이 있다”고 조심스레 평가했다.
전반적인 기획의도에 대해 묻자 김 교수는 “딱히 계획한 것은 없다”며, 짐짓 한껏 여유를 보였다. 김 교수는 “대전의 이응노 미술관처럼 다수의 걸작을 소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타 기획전처럼 여러 가지 작품들 중 주제를 정해서 보여주는 방식을 고려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김 교수는 이응노 기념관의 특징을 다수의 습작과 스케치로 꼽았다. 김 교수는 “이응노 기념관이 고암의 고향에 들어서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무엇보다 창작활동의 모태가 된 국내활동기간에 초점을 맞추었다”며, “향후 기념관의 역할이 무척이나 많다. 무엇보다 자료를 충실하게 수집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고암 이응노는 20세기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누구보다 독보적인 위치에 있으며, 그의 작품들은 동시대의 작품들보다 중요한 성과를 배출했다. 김학량 교수에 따르면 “1950년대 후반의 한국미술계는 전통화단에 서양화의 기류가 폭포수처럼 흘러드는 변화의 시기였다”며, “당시의 대부분의 화가들은 전통의 제도에 주눅이 들어 현대적인 감수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게을렀고 안목도 없었다지만, 고암은 달랐다. 이상범과 변관식 등이 정통산수화를 근대화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고암은 근대화를 한국적으로 현대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인들은 ‘동양의 미학으로 서양의 논리를 갖고 논 화가’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전통의 지필묵을 이용해 권위에 주눅 들지 않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사람이 고암 이응노였다는 것이다. 고암의 고향이 홍성이고, 기념관은 고암의 삶과 예술을 오롯이 담아야 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지론이었다.
고암의 삶과 예술을 오롯이 담은 ‘이응노의 집’
김학량 교수가 칭찬해 마지않는 기념관의 건축은 조성룡(69·성균관대 건축학과 석좌교수·도시건축) 교수의 작품이다. 조 교수는 건축계에서 ‘풍경의 건축가’로 불린다. 의재미술관(2001)·선유도공원(2002) 등 있는 그대로의 지형을 살리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조 교수는 문뜩 “고암의 삶을 아느냐”고 반문했다. 조 교수가 생각하는 고암은 ‘고독한 예술가’였다. 때문에 조 교수는 이응노기념관의 외부는 농촌의 풍경과 어우러지도록 최대한 인공적인 장식을 배제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나무와 거친 느낌의 콘크리트만을 노출시켰다. 내부는 조 교수가 생각했던 대로 ‘삭막’한 느낌을 은연중에 강조했다. 조 교수는 “고암이 살던 당시의 풍경을 되살려 방문객들로 하여금 고암 이응노가 바라보았던 뜻 깊은 풍경의 여러 장면들을 각별히 바라보게 하면서 고암의 예술혼을 경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고 밝혔다.
때문에 조 교수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을 ‘이응노의 집’이라고 부른다. 고암의 일생과 작품 활동에 애착을 가지고 있던 국내 학자,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유년시절, 고암이 생각하는 생가의 이미지를 최대한 담으려 노력했다. 1980년대의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당시의 논길을 되살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조 교수는 “미술계의 담론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것은 고암의 고향과 생가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말했다.
이역만리 타지에서도 언제나 월산과 용봉산으로 기억하는 내 고향 홍성을 그렸다는 고암 이응노. 그를 기리는 기념관과 복원된 생가가 곧 첫 선을 보인다. 준비기간이 길었던 만큼 군민들이 이응노 기념관에 거는 기대도 그만큼 커졌다. 고향과 나라를 뒤로한 서글픔을 예술혼으로 불살랐던 고암의 정신을 담은 공간이자 무엇보다 그간 미공개로 남았던 그의 유작을 비롯한 대작들을 감상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이응노 기념관으로 태어나길 기대하고 있다.이는 ‘고암은 홍성사람’이라는 홍성군민들의 자부심이 될 것이고, 대내외적으로는 홍성군의 인지도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다. 고암 이응노 기념관이 홍성군내 문화예술활동의 새로운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