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의 최후를 보며

[김상구 교수의 돋보기 & 오늘과 내일]

2011-11-03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피범벅이 된 채 시민군에 끌려 다니다 최후를 맞이한 카다피의 사진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군복을 입고 리비아를 철권 통치하던 사나이가 하수구에서 ‘쏘지마! 쏘지마!’를 외치며 시민군에게 끔찍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언론에 비춰지던 그의 모습과 최후의 처참함은 대조를 이룬다. 카다피는 한때 근대화 정책으로 오늘의 리비아를 건설하는데 일조했고, 미국에 대항하여 아랍세계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인물이기도 했다. 부패한 왕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리비아를 건설하려 했지만 42년간의 장기집권은 그를 독재자로 변하게 했다. 248일간의 내전은 약 3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피투성이가 될 때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황금색 권총은 아쉽게도 자신의 머리를 겨누지 못했다.

카다피의 시체는 정육점 냉장고에 보관되다 시멘트 바닥에서 시민들의 관광거리가 되다시피 했으니 혹자는 그의 죽음을 비극적이라고 말한다. 이럴 때 비극적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보기 흉하게 죽은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비극의 주인공은 ‘그의 불행이 악덕과 패륜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실수나 나약함에 의해서 빚어지는 인물’이라고 한다. 카다피를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준에 비추어볼 때 비극의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며 징벌을 감수하고, 자신의 파멸이 비관적이고 패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낙관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비극의 주인공을 가리켜 ‘죽음속의 승리(triumph in death)’라고 말한다. 카다피는 많은 자국민을 죽음으로 이끌었으니 비극적 인물과는 달리 실패한 인생이라 말할 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셸리의「오즈만디어스」라는 시에서 이집트의 권세를 자랑하던 왕들이 자신은 ‘왕 중의 왕’이며 ‘후세의 모든 이들이여 나의 업적 앞에 절망하라’라고 큰소리쳤지만 그들의 부서진 조각상은 사막의 모래에 반쯤 묻혀있고, 그 석상(石像)에는 오히려 왕에 대한 싸늘한 석수장이의 냉소만이 생생하게 남아있다고 읊고 있다. 권력의 무상함이다. 파라오들은 죽음이 두려워 영생을 꿈꾸고, 시체를 썩지 않게 밀랍으로 방부처리 하였지만 생명의 유한함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백년도 살기도 힘든 인생을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발버둥 친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도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 자기가 맡은 시간만은 장한 듯이 무대 위에서 떠들지만, 그것이 지나가면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일 뿐’이라고 인생의 무상함을 맥베스를 통해 읊조리고 있다. 이것은 삶의 본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나온 패러독스다.

모든 생명체가 태어난다는 것은 죽음을 필연적 전제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내일 죽는다 해도 생명체는 삶의 강한 의욕을 불태운다. 죽음의 본능보다는 삶의 본능이 강열하고 더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힘들어 자살을 택하는 것은 삶의 욕망에 대한 우회적인 그림자다. 평생 동안 삶과 죽음에 대한 고매한 글을 써왔던 작가가 죽음 앞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기도 하며, 암환자를 수술해왔던 외과의사가 암에 걸리자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본능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모든 생명체는 필사적으로 살려는 본능을 발산한다.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다. 그러니 삶에 대한 애착을 끊으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의 무덤에 삽으로 흙을 덮고, 비명에 간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와서도 우리는 샤워를 하고 돈을 세며 회의를 하고 내일을 걱정한다.

그러나 삶의 본능이 아무리 강렬해도 모든 사람의 삶의 끝자락에서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죽음은 익숙했던 모든 것들로부터의 이별을 의미한다. 죽음은 이루려던 모든 것을 허망하게 한다. 죽음이라는 낮선 곳으로의 여행은 공포심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은 세월이 갈수록 옆자리로 다가온다. 죽음이 누구나 맞이해야 할 대상이라면 저만치 밀쳐둘 수만은 없다. 나이가 들면 ‘웰빙(well-being)’ 못지않게 ‘웰다잉(well-dying)’도 곁에 두어야 할 듯싶다. 어떤 모습으로 죽느냐하는 것도 삶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카다피의 죽음이 꼭 남의 일만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