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금강산이라 불리는 ‘용봉산(龍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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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금강산이라 불리는 ‘용봉산(龍鳳山)’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0.04.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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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관우의 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2〉
용봉산 병풍바위 전경.
용봉산 병풍바위 전경.

우리나라의 북쪽에는 일만 이천봉우리를 자랑하는 ‘금강산(金剛山)’이 있다면 남쪽에는 ‘작은 금강산’이라 불리는 ‘용봉산(龍鳳山; 381m)’이 있다. ‘호서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리는 용봉산은 누에의 등처럼 평평한듯한 10여㎞의 능선을 따라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어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산이다. 산 이름에 용(龍)과 봉황(鳳)을 함께 넣은 것만으로도 비범한 산세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이러한 연유로 산세가 ‘용의 모습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인데, 고려시대에는 차령산맥 너머 충청도 서북부 최대도시인 홍주(洪州; 홍성)의 북쪽 진산이다. 80여년의 세월동안 한밭(大田)땅에서 더부살이하던 충남도청이 지난 2012년부터는 천년역사의 충청도 홍주 땅에 본 터를 잡았다. 용봉산은 홍성8경중 제1경으로 충남도청신도시(내포신도시)를 한 아름 넓은 품안에 안은 채 포근히 감싸고 있다.

충청도를 가르는 차령산맥의 지맥으로서 가야산의 한 줄기인 용봉산은 고려시대에는 ‘북산(北山)’이라고 부르다가 조선시대에는 8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팔봉산’이라고도 불렸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기암괴석으로 뒤덮인 용봉산을 금강산과 비슷하다고 해서 오래 전부터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불린다. 용봉산의 남쪽 기슭에는 통일신라 39대 소성왕 원년(799)에 지은 사찰로 알려진 ‘용봉사(龍鳳寺)’가 안온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온갖 불교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는 문화재의 보고이기도 하다.

용봉산은 그렇게 계곡이 깊거나 산세가 높지는 않지만, 지금은 충남도청내포신도시가 펼쳐진 넓고 평평한 평야지대에 불쑥 솟아오른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천년역사의 각종 사연을 담고 있는 바위산으로 이루어져서 한층 더 크고 우람하게 보인다. 그래서인지 용봉산은 봄이면 마치 수석(壽石) 전시장처럼 아기자기하고 기묘한 바위 사이로 피어난 온갖 꽃들이 어우러져 절경이고, 여름철에는 잠시 폭우라도 쏟아지면 삽시간에 온 산이 소나무 수풀에 쌓인 채 폭포를 이루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며, 가을철에는 빛깔 고운 단풍이 등산객을 유혹하며 겨울철 눈 덮인 설경은 한 폭의 수목화 작품을 연출한다. 특히 병풍바위, 장군바위 등 전설을 간직한 기암들이 늘어서 있는 능선을 걸을 때 바라보이는 동쪽의 홍성과 예산의 들녘은 물론 서쪽으로는 수덕사를 품고 있는 덕숭산과 이웃한 가야산 너머 서해바다까지 조망되는 시원한 시야에 해질녘 노을이 물드는 태양빛 풍경은 일품중의 일품으로 꼽힌다.

용봉산에는 최영 장군 활터도 있다. 용봉산이 자리하고 있는 홍성군 홍북읍에서 태어난 최영 장군이 이곳에서 활을 쏘았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부터는 짤막한 기복이 반복되는 평탄한 기암괴석 사이로 능선이 이어지는데, 그 많은 바위마다 장군바위, 촛대바위, 어머니바위, 삼형제바위, 사자바위, 부엉 바위, 매바위, 마당바위, 가마바위, 삼등바위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 등산로는 중간 중간에 험로와 일반 등산로로 나눠지는데, 험로를 택하면 기암괴석을 직접 타면서 암벽 등반의 묘미를 조금씩 맛볼 수 있기도 하다. 

용봉사와 오른쪽 송림사이로 보이는 병풍바위.
용봉사와 오른쪽 송림사이로 보이는 병풍바위.

용봉산에는 통일신라시대 소성왕 원년(799)에 지은 사찰이라고 전해지는 용봉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용봉사에는 정확한 사적기는 없으나 두 개의 나라 보물이 있다. 하나는 지장전에 보관돼 있는 괘불탱화(보물 제1262호)이고 다른 하나는 용봉사 뒤에 있는 마애관세음보살상(보물 제355호)이다. 영산회괘불탱화는 조선 숙종 때 조성됐다고 한다. 왕자가 일찍 죽자 숙종 16년(1690년) 승려화가 진각이 그렸고, 영조 1년(1725년)에 그림을 고쳐 그렸다고 전한다. 숙종보다 먼저 세상을 뜬 아들은 연령군이다. 연령군을 각별하게 챙겼던 영조가 영험하게 잘 그려진 괘불탱화를 동생의 명복을 비는 의식에 걸도록 했고, 연령군의 묘가 덕산으로 이장되면서 용봉사에 걸리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괘불탱화는 사월초파일에만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용봉사에는 고려시대 불상인 마애석불(충남도유형문화재 제118호), 석조(충남도문화재자료 제162호), 부도(충남도문화재자료 제168호), 절구, 맷돌 등 유물들로 미루어보면 오히려 고려시대에 지어진 사찰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특히 용봉사 바로 위에는 약4m 크기의 신경리 마애석불(보물 355호)이 산행의 초입에서 온화한 미소로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고려시대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불의 온화한 미소가 일품인데, 명문이 있는 마애불로는 국내 유일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애불의 오른편, 용봉사의 지붕 위쪽으로는 마치 병풍을 펼친 것 같은 기묘한 기암괴석의 병풍바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신경리 마애불과 용봉사 사이에는 풍양 조씨의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은 조선중기의 한 세도가가 용봉사 터가 명당이라는 소문을 듣고 절을 없앤 후에 그 자리에 선조의 무덤을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져 온다. 그 당시 용봉사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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