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100주년의 감회를 되새긴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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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100주년의 감회를 되새긴다①
  • 이상선 <전 홍성군수>
  • 승인 2020.12.10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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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1962년 1월 1일부터 홍성군청 산업과에 처음 발령을 받고 홍성군청에서 13년을 근무하다가 충남도청으로 전입돼 30여년 객지생활을 하다가 제31대 홍성군수로 부임하는 영광을 얻었다. 생각해보니 전임 30명의 군수 중에는 민선군수 한사람만 홍성출신이고 다른 29명은 홍성출신이 아닌 분들이라 본토배기 홍성사람으로는 처음 관선군수가 된 것이다.

흔히들 금의환향이라고 하지만 고향 어른들은 초·중·고등학교를 홍성에서 다녔으니 여전히 코흘리개 어린애취급을 하고 군정수행에 적극적인 협조보다는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밖에서 듣기에는 홍성군수가 되어 부임하게 되면 부임 초부터 타 지역으로 가기를 희망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얘기다. 

천년홍주역사에 걸맞도록 예부터 19개 군현을 다스리던 홍주목사는 서해안을 중심지로 경제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로서 국가의 각급기관들이 밀집되어 있어 인근 시군까지 관장하는 행정기관이 있으므로 홍성군수는 기관간의 유대와 협조를 생각해야 하는 투철한 애향심과 국가관이 있어야 했다. 애향심이 전제가 되는데 타지방출신 군수들이 배타적이고 터주대감들의 입김에 시달리다보니 한곳에 머무르기를 싫어했을 것이니 군정은 발전이 활기차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기 때문에 부임한 고향군수로서의 책임감에 억눌려 있었다. 

홍성읍 고암리 651번지가 본적지이니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고 고향의 정서가 있어 늘 홍성자랑을 하고 다녔다. 우리나라에서 충절 애국투사들이 가장 많이 탄생한곳이 홍성이라고 어디를 가도 큰소리 쳤다. 고향발전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태를 벗어나 군민들이 적극적으로 군정에 참여토록 하는 방안으로 홍성의 자랑스러운 인물들의 공훈을 기리고 현창해 그 유지를 본받아 애국심 애향심을 고양시켜 군정발전의 동력으로 삼고저 근세의 항일 애국투사 백야김좌진장군과 만해한용운선사의 생가를 복원하고 사당을 건립해 군민의 정신적 성역으로 해 애국정신의 역사적 산 교육장으로 만들어 자긍심을 갖게 하려고 군정의 구호를 ‘서해안의중심 활기찬 홍성건설’로 내세우고 불굴의 항일독립정신을 바탕으로 선각자들의 기상을 군민들의 애향심으로 승화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백야장군의 생가터를 찾았더니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청산리대첩의 주인공이시고 장군의아들 김두한 의원의 국회의사당 인분투척사건 남산공원에 장군의 기념비를 세울 때 초등학교 다니던 어린이도 성금을 보탠 기억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유세차 홍성에 왔을 때 남산공원 비석까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기념비에서 묵념하던 일도 잊을 수 없다. 청산리계곡에서 악전고투하며 물리치신 장군의 쾌거는 바로 고유한 홍성정신의 승리가 아니었나 한다. 

부임 초에 평소에 흠모하던 백야장군의 생가터를 찾았더니 아는 이가 없었다. 뜻있는 홍성사람들의 무관심이 증거였다. 갈산면 행산리 밭둑에 말뚝이 박혀있는 것을 보았더니 그 나무 한편에 김좌진장군생가터라고 적혀있어 생가지를 찾았다. 수소문 해보니 이웃에 있는 결성면 성곡리에도 한용운 생가터에 똑같이 말뚝에 한용운생가터라고 표시해 생가터 임을 알게 됐다. 생가터를 표시해 놓은 분은 서산출신 조영호 군수가 홍성에 와서 찾아 놓은 것이라 했다.

<계속>

 

이상선 <전 홍성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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