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나듯 이민가고 육체노동 전전… 아버지 죽음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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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나듯 이민가고 육체노동 전전… 아버지 죽음 그 후
  • 박만순 오마이뉴스 기자
  • 승인 2021.05.2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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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충남 홍성군보도연맹원 학살과 유족들의 삶 〈2〉
광천읍 폐광에서 학살된 이강세(뒷줄 왼쪽 첫 번째).

“야, 종섭아 큰일 났다!” “왜요 어머니?” “난리가 났다.” “예?”

이종섭(1933년생)의 어머니 이묘희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큰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종섭의 아버지 이강세(1909년생)가 경찰에게 붙잡혀 갔다는 것이다. 이묘희는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종섭을 비롯한 딸 넷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1950년 6월 25일의 일이다.

이묘희는 6개월 전 불안했던 나날이 떠올랐다. 1947년부터 2년에 걸친 남편의 도피 생활은 ‘지옥 같은 삶’ 그 자체였다. 거기다 막내 이종민까지 임신하니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그런데 작년에 남편이 홍성경찰서에 자수하고 보도연맹 홍성군지부 선전부장을 맡고 나서부터는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늦둥이 종민(1948년생)이의 재롱을 보며 오랜만에 이강세·이묘희 집안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그런 지 6개월도 채 안 돼 남편 이강세가 식전에 홍성경찰서로 끌려가는 난리가 났다. 그날은 다름 아닌 1950년 6월 25일. 이날 정말로 나라에 난리가 났다는 것은 나중에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됐다. 천만다행으로 이강세는 그날 집으로 돌아왔다. “그냥 물어볼 게 있어 그랬다는구만.” 이강세는 덤덤한 표정으로 아내에게 말했다. 

안심하기는 일렀다. 이틀 후 이강세는 다시 연행됐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1950년 7월 11일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광산터에서 학살되었다.
 

■ 6·25 나던 날 예비검속 당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장(장석윤)은 전국 각 도의 경찰국장에게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형무소 경비의 건’이라는 제목의 비상통첩을 전언통신문으로 내려 보냈다. 이어 6월 29일에는 ‘불순분자 구속의 건’, 6월 30일에는 ‘불순분자 구속처리의 건’, 7월 11일에는 ‘불순분자 검거의 건’이 잇따라 하달되었다. 경찰의 예비검속은 일련의 통첩을 통해 진행됐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요시찰인 단속 및 구속’은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을 일시에 검거·구속한다는 의미로 여기에는 보도연맹원뿐만 아니라 전국의 형무소재소자(정치·사상범), 좌익 활동가를 모두 일컫는다.

보도연맹원 예비검속과 학살은 강원도부터 시작됐다. 당시 6사단 헌병대에 근무한 김만식(1926년생)은 “6월 28일경 강원도 횡성에서 춘천지역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는 30일에는 원주에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다.(2007년 11월 13일, 진실화해위원회, <김만식의 공개증언>)

당시 교통 수단을 감안하면 춘천 지역 보도연맹원들은 늦어도 6월 26일부터 춘천경찰서에 의해 예비검속 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 북부 지역은 6.25 발발 직후부터 보도연맹원들을 붙잡아 들였다는 얘기다. 그런데 홍성군의 이강세는 6월 25일 1차로, 27일에 2차로 예비검속을 당했다. 이는 중부 지방 경찰서들도 요시찰 인물에 대해서는 6.25 발발 직후부터 예비검속을 단행했음을 알려준다.
 

■ 홍성군인민위원장이 시신 수습 지시해
이강세가 홍성경찰서 상무관에 구금되자 큰딸 종섭은 막내 종민을 업고 아버지 도시락을 들고 찾아갔다. “아이고, 우리 애기 왔구나”라며 막내아들을 건네받은 이강세의 눈은 슬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불과 2~3분의 면회가 끝났지만 아기 이종민은 아버지의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이강세는 경찰에게 부탁해 경찰서 앞 매일홍성시장으로 갔다. 토마토를 사서 아들의 손에 쥐어주니 그제야 아버지의 품에서 떨어졌다.

홍성군내 보도연맹원 대부분은 각 지서를 경유해 홍성경찰서 상무관에 구금됐다. 홍성읍 옥암리 소쇄울의 김창모(1922년생)와 갈산면 상촌리 최정희(1918년생)가 그런 경우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7월 10일 경찰에 연행된 최정희가 다음날 용봉산에서 학살됐다는 소식이 상촌리에 쫙 퍼졌다. 최정희 사촌 동생 최종로(1930년생)는 집안 어른들과 함께 상여를 메고 30리(12km) 길을 걸어가 시신을 수습했다.

예외적으로 갈산면 행산리 텃골에 살던 김종갑은 갈산지서에 구금됐다가 학살터인 갈산면 행산리 이동부락 광산으로 곧바로 끌려갔다. 이동부락 광산 입구에서는 김종갑을 포함한 7~9명이 학살됐다. 홍성군 보도연맹원 중 1차로 끌려가 학살된 이들은 보도연맹 간부급이었다. 이강세와 이관세를 포함한 보도연맹원 약 20명은 트럭에 태워져 광천읍 담산리 광산터로 끌려가 학살됐다.

홍성경찰서에 남아있던 여성 2명을 포함한 보도연맹원 80여 명은 홍북면 상하리 용봉산 2곳에서 학살됐다. 여기에는 홍성농업학교 학생이었던 이흥성(홍북면 봉신리)처럼 학생도 포함됐다. 학살이 일어난 때는 1950년 7월 11일로 북한군이 홍성에 진주하기 하루 전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다음날 인민군이 홍성군에 들어왔고 한보국이 홍성군 인민위원장을 맡았다. 한보국이 누구인가? 한보국은 1919년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의 아들이다. 그는 6·25 전 월북했다가 전쟁 발발과 더불어 남하했다.

인민위원장이 된 한보국이 제일 먼저 내린 지시는 ‘이강세의 시신을 수습하라’는 것이었다. 한보국과 이강세는 해방 직후부터 홍성군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에서 뜻을 함께 한 동지였다. 하지만 한보국의 지시에도 이강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 옴짝달싹 못해 이민 결심
토마토를 사준 아버지 이강세가 광천읍 폐광 터에서 학살당한 후 이종민의 삶은 어땠을까? 그는 아버지 몫의 땅이 3500평이나 되어 보리쌀은 먹을지언정 굶지는 않았다. 그는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이범선 소설을 원작으로 유현묵 감독이 메가폰을 쥔 영화 ‘오발탄(1961년)’을 본 후부터 그의 롤 모델은 유현묵이 되었다.

그는 서울중앙방송국 공개 채용에 응시했다. ‘언젠가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으로 우선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다. 그런데 ‘귀하는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있어 아쉽게도 떨어졌습니다’라는 통보가 돌아왔다. 아버지 사건으로 인한 신원조회로 낙방한 것이다. 그는 앞이 캄캄했다. 무슨 일을 하려 해도 신원조회에 걸려 옴짝달싹 못할 거라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이종민은 대한민국이 싫어졌다. 외국으로 나가는 방법은 이민밖에 없었는데 그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권을 신청했지만 3년 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처가를 통해 육군소령이 신원보증을 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허둥지둥 보따리를 싸 미국으로 간 때가 1975년이었는데, 2005년이 되어서야 이종민은 되돌아와 영구 귀국했다. 그는 홍성신문 상무이사를 맡기도 했는데, 2017년부터 홍성군유족회 회장을 맡았다. 그는 아버지의 청춘을 앗아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다.
 

■ 연탄가스로 숨진 남편
아버지가 전쟁 때 학살당한 자식들의 삶은 비슷하다. 아버지 최정희의 얼굴도 못 본 최재선(1951년생)은 어머니가 1955년에 개가해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갈산중학교에 억지로 입학했지만 수업료를 제대로 낼 수 없었다. 다행히 졸업은 할 수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최재선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양복점에서 기술을 배우며 일을 했다. 잠시 상경했다가 시골로 내려와 1986년부터 35년째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김수일(1949년생)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머니가 1951년도에 개가하자 형은 작은아버지에게 맡겨지고, 자신은 어머니를 따라갔다. 갈산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결국 입학금을 내지 못해 쫓겨났다. 15세에 강원도 춘천 식당에 취업해 설거지부터 시작해 육체노동 세계를 전전했다. 서울에서 개인택시와 카센터를 하다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시골로 내려왔다. 치매 걸린 어머니를 14년 모시기도 했다.

광천읍 폐광에서 학살당한 김창모의 딸 김일선(1949년생.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소사1동)의 삶은 훨씬 기구했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광천읍 내죽리로 개가했다. 김일선은 초등학교도 입학 못하고 사촌 동생 애기업개 일을 했다. 밥, 빨래 등 종일 일을 했지만 구박만 돌아왔다. 1965년 17세에 창신동에서 식모살이를 했는데, 한 달 월급이 500원이었다. 19세에 결혼했지만 식은 올리지도 못했다. 시부모를 모시고 시누이, 시동생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고된 신혼살림이었다. 1972년 음력 1월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남편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렇게 허망하게 남편이 죽었을 때 김일선의 나이는 24세였다. 이후 자식 둘을 키우는 일이 김일선에게 남겨졌다. 그녀는 공장 생활을 전전하다 현재는 공공근로 일을 하고 있다. 6·25때 아버지가 학살당한 고통이 반백년 넘게 이어져 온 것이다.

증언자 이종민 씨(이강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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