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昌龍 名唱(김창룡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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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龍 名唱(김창룡 명창)
  •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과 교수>
  • 승인 2021.11.0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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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裘世業達磨心
唱調成形賴三金  
天具衆美遵家法 
早入藝苑斫桂林 
雖曰偏古未諧俗
莫恨峨洋少知音

소리를 가업으로 삼았으니
도 전하려는 달마의 마음이었나.
창조(唱調)가 모양을 갖추기까지
세 부자에 힘입은 게 많았다네.

천구(天具)의 여러 장점 지녔고
가법(家法)을 충실히 따르신 분.
예원(藝苑)에 일찍 들어가
도끼로 계수나무를 찍었다네.

비록 고조(古調)에 치우쳐
세속에 안 맞는다고들 하지만
아양곡 알아줄 이 적다고  
한탄하지는 마시오들.

[해설]
근대 오명창 가운데 한 사람인 김창룡의 본관은 김해, 충청남도 서천 출신이다. 경기⋅충청 지역에 전승돼온 고제(古制) 판소리의 거장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판소리를 업으로 삼아왔다. 할아버지 김성옥(金成玉: ?∼?)은 진양조 장단을 창시했고, <무숙이타령>의 대가인 아버지 김정근(金正根: 1839∼1895) 역시 ‘상궁접’(엇중모리 6박)이라는 장단을 만들었다. “조선 소리의 곡조는 김문(金門)에서 거의 다 되다시피 하였다”(정노식, 『조선창극사』)는 평이 나올 정도다. 김창룡의 아우 창진(昌鎭: 1875?∼?) 역시 고종 조에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고, 아들과 손녀까지 소리의 가통(家統)을 이었다고 한다. 유전인자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안타깝게도 김창룡의 소리는 전승이 끊어졌고 식민지시기에 나온 음반만 전할 뿐이다. 

  그는 여러 날 소리를 해도 목이 쉬지 않았다고 한다. 『노자』에 이른바 ‘종일불사(終日不嗄)’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타고난 성음에다 ‘소리 가문’을 배경으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공연 이외에도 방송 출연, 음반 취입, 후배 양성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더늠은 심청가 <화초타령> 대목과 적벽가 <삼고초려(三顧草廬)> 대목이라 한다. 

  그는 가문의 소리제를 계승하면서도 동편⋅서편을 가리지 않고 장점을 찾으려 했다. 그가 남긴 음반 소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고제(古制)를 중시해 가락이 단조롭고 구성진 맛이 덜하다. 가법을 지키는 것과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이 적지 않았을 듯하다. ‘변화’ 쪽을 과감히 택한 송만갑의 경우와는 비교가 된다. 김창룡 류의 담박유미(淡泊有味)한 소리를 좋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의 담백한 소리는 관서 지방에서 인기가 있었다. 황해도⋅평안도 지역에서는 김창룡을 제일의 명창으로 쳤다고 한다.

 아는 사람은 알아줄 터이니 지음(知音) 적음을 한탄할 일은 아닐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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