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병의 상징은 홍주의병, 중심지는 홍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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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의병의 상징은 홍주의병, 중심지는 홍주성이다
  • 글·자료|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12.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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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홍주의병 발상지 홍주 〈5〉
홍주의병기념탑.

우리의 역사에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기에 이르는 기간은 반만년 민족사에서 최대의 시련기였다. 1868년 이른바 명치유신 이래로 강력한 군국주의를 표방한 일제가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우고 대륙팽창정책을 추진하면서 조선반도의 침략을 감행해 왔기 때문이다.

일제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 이래 청나라와 러시아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1894년 청일전쟁, 1904~05년 러일전쟁 등 침략전쟁을 연이어 도발하며 대조선의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했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한국은 결국 ‘인혈(人血)을 빨다가 골수(骨髓)까지 깨무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제 침략과 지배를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 집요하고도 처절한 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의병전쟁을 비롯해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단체의 계몽운동, 교육과 언론활동, 산업진흥을 통한 실력양성운동 등 이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추진된 국권회복운동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청일전쟁 직후부터 국치 이후까지 전후 20여 년간 지속된 의병전쟁은 한국 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보여준 주체성의 정화(精華)였다. 곧 의병전쟁은 전 민족의 힘이 결집된 대일전면전인 동시에 민족의 성전(聖戰)으로 승화됐던 것이다.

의병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처음으로 봉기했다. 곧 이 시기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 점거하는 갑오변란을 일으켜(1894년 음 6월 21일) 조선에 대한 군사적 압박이 본격화되고 이를 필두로 김홍집 친일내각이 들어서 갑오경장을 추진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반발을 야기했다. 또한 1895년에는 명성황후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이 연이어 발생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반일감정은 극도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의병이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일어난 의병(전기의병)은 이후 국치 직후까지 20여 년 동안 일제 침략의 여러 단계와 그 양상에 대응, 항전의 강도를 차츰 더해 갔다.
 

■충청의병의 상징은 바로 홍주의병이다
1895~96간에 일어난 을미의병은 재야 유생을 주축으로 하고 일반 평민층이 여기에 가담해 봉기했다. 곧 양반 유생이 상층 지도부를 형성했지만, 일반 전투원인 병사부는 평민층이 담당하고 있었다. 을미의병 가운데 이름난 의진은 대개가 이러한 범주, 곧 양반 유생(지휘부)을 능동으로 하고 평민(병사부)이 피동이 돼 결합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을미의병의 상징인 제천의병의 경우도 의병장 유인석을 중심으로 화서 이항로 문파의 유생들이 지휘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충청도 홍주의병(洪州義兵)도 역시 유생이었던 김복한·이설·안병찬 등이 중심이 된 경우다. 충청의병은 을미의병의 상징이며, 그 중심에는 충북의 제천의병과 충남 홍주(洪州; 홍성)의 홍주의병(洪州義兵)이다.

홍주의병은 홍주지역에서 유학자와 평민이 함께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항쟁한 반일의병이다. 1896년 홍주의병은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행위에 맞서 단발령 공포 직후 봉기해 홍주의 유학자 김복한 등 주도자들이 체포돼 옥고를 치르는 등 탄압을 받았다. 이들은 을사늑약에 항거해 1906년 다시 의병을 봉기했으며, 일본 정규군과의 치열한 홍주성전투를 치렀다. 홍주성전투는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폭발시킨 도화선이 됐으며, 충청의병의 본류였다. 결국 충청의병의 총체적·상징적 구심체로 역할을 했으며, 그 중심에는 충청도 4목이었던 홍주성이 있었다. 충청도에서 공주도 아니고 청주나 충주도 아닌 제천과 홍주가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은 투쟁의 저변에 깔린 의병의식과 정치사회적, 사상적 기반의 정체성이 끈질긴 항일투쟁의 전개 배경으로 주목되는 점이다. 홍주의병은 유교지식인 뿐만이 아니라 평민들이 합세해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투쟁을 감행했다.

홍주의병은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인해 불발로 끝난 의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홍주의병의 전 단계라 할 수 있는 ‘모병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96년 홍주의병이 본격화 되기 이전인 1895년 4월부터 홍주의 ‘광천’을 중심지역으로 한 안창식 등의 모병운동은 제1차 홍주의병의 시작이었다. 이는 1896년 홍주의병의 본격화 이전에 이미 의병봉기를 위한 준비가 민간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미 청양의 정산전투와 남포전투와 같은 재기의 사실에서 확인되고 있다. 

홍주의병의 합천전투(지금의 청양군 화성면 합천)와 지치(支峙洞, 현재의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의 재기를 통해 홍주성전투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후 홍주의병은 광천을 거쳐 결성으로 진군, 하루를 지낸 뒤 5월 19일(음력, 4월 26일)에 홍주로 들어왔다.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의병부대는 구식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 공격했다. 의병은 홍주성 남문에서 일본 헌병과 총격전을 벌였으며, 오후에는 홍주성 서문으로 부대를 진격시키자 일본 헌병들이 홍주성 동문을 통해 덕산방면으로 도주했다. 드디어 의병들은 5월 20일 아침에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했다. 
 

홍주성으로 진격하는 의병 행렬을 재현한 조형물.

■홍주의병은 충청의병의 정체성·상징성의 핵심
전 국민들의 총력전 단계로 승화된 후기의병 시기의 의병전쟁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의병 주도·참여 신분층이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전기·중기의병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정 신분층의 의병 편중화 경향은 후기의병 시기에 와서 완전히 극복됐으며, 양반 관료나 유생 등 귀족 신분에서부터 해산군인, 포수와 농민·상인, 심지어 머슴 등 다양한 직업의 하층 신분에 이르기까지 전 신분층이 능동적이고도 주도적으로 의병전쟁에 투신하게 됨으로써 국민전쟁의 성격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의병전쟁이 구국의 성전으로 승화됐음을 의미하고 있다. 의병장의 출신 신분층이 전 계층에 걸쳐 있었던 점은 전투력의 고양에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그 가운데서도 해산군인과 하층민의 능동적 참여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홍주의병이 홍주지역의 유생지식인과 평민인 농민 등의 참여다. 특히 홍주목의 관할지역이 광역화돼 있었고, 따라서 의병투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홍주성(洪州城)’이 있었다는 사실은 충청의병, 다시 말해 홍주의병의 정체성과 상징성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1455년(세조 1) 당시 홍주목 관할 진관(鎭管)은 ‘홍주군, 결성군, 예산군, 덕산군, 대흥군, 서산군, 해미군, 태안군, 아산군, 온양군, 신창군, 당진군, 면천군, 보령군, 남포군, 서천군, 비인군, 홍산군, 평택군’이었다. 또 홍주의병의 모병시기인 1895년 5월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23부제가 시행됐는데 이때 편제된 홍주부 관할지역도 ‘홍주군, 결성군, 예산군, 덕산군, 대흥군, 서산군, 해미군, 태안군, 청양군, 정산군, 아산군, 온양군, 신창군, 당진군, 면천군, 보령군, 남포군, 서천군, 비인군, 한산군, 임천군, 홍산군’ 등 22개 군이다.

따라서 충청남도의 ‘충남의병기념관’의 건립장소로는 용역을 포함한 제2의 선택적 사항을 차치하고 마땅히 ‘홍주(홍성)’여야 한다는 점이다. 당시 충청의병으로 상징되는 홍주의병은 홍주성을 거점으로 해 1895년의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1896년 1월에 봉기한 홍주의병은 1895년의 홍주부 행정구역 범위의 인물들이 참여했으며, 활동 또한 홍주부 지역에서 이뤄진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1906년 홍주의병은 예산 광시에서 봉기했다가 청양 합천전투에서 패했다. 다시 의병을 일으킨 곳은 홍산의 지치로 서천, 남포, 결성을 지나 홍주성을 점령하고 항전했다. 홍주의병전투의 봉기와 최후의 목적은 바로 ‘홍주성(洪州城)’ 점령을 통한 항전이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홍주는 지역의 공동생활권이며, 방위권과 경제권, 문화권도 동일한 특성이 있는 곳이다. 충남 공주나 대전 등 동부권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을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 서북부지역을 ‘홍주문화권’으로 보고 있으며, 충청남도의 행정수도 또한 충청남도청을 비롯한 행정기관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홍주의병으로 대표되는 충청의병의 정체성과 상징성, 그 정신이 서린 곳이다. 이곳이 바로 ‘홍주성’이며, 홍주의병들이 잠들어 있는 ‘홍주의사총’이다. 

홍주의사총 뒤편 언덕의 ‘홍주의병기념탑’이 오늘도 옛 홍주목·홍주부 지역에서 홍주성으로 진격하는 의병들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이 일제에 항거해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바친 넋이 잠든 ‘홍주900의사총’이 있다. ‘홍주성(洪州城)’과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은 충청의병, 홍주의병 항쟁의 상징적 존재이자 정체성의 핵심정신이다. 이곳에 충청의병, 홍주의병의 정체성이자 상징성을 간직한 ‘충남의병기념관’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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