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선언서가 ‘눈’이라면 공약삼장은 ‘눈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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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서가 ‘눈’이라면 공약삼장은 ‘눈동자’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3.1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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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33〉
  • 만해 한용운과 독립선언서 공약삼장(公約三章)비

홍성읍 대교리 대교공원에는 ‘만해 한용운과 독립선언서 공약삼장(公約三章)비’가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書碑)’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 ‘선언서(宣言書)’와 ‘공약삼장(公約三章)’ 작성과 관련해서는 홍주(홍성) 출신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핵심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기념비에는 중앙에 선언서와 공약삼장과 민족대표 33명의 이름이 오석에 새겨져 있고, 좌측에는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민족 대표의 모습과 오른쪽에는 만해 한용운이 공약삼장을 작성하는 모습이 부조 동판에 새겨져 있는 기념비다. 홍성에 ‘공약삼장(公約三章)’비는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의 만해 생가지와 홍성읍 대교리 대교공원 두 곳에 건립돼 있다.

‘선언서(宣言書)’와 ‘공약삼장(公約三章)’비에는 3·1독립선언서와 독립선언서 초안에 만해 한용운이 추가했다고 널리 알려진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公約三章)은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正義)·인도(人道)·생존(生存)·존영(尊榮)을 위하는 민족적(民族的) 요구(要求)니 오즉 자유적(自由的) 정신(精神)을 발휘(發揮)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排他的) 감정(感情)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최후의 일인(一人)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민족(民族)의 정당한 의사(意思)를 쾌히 발표하라. △일체(一切)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吾人)의 주장(主張)과 태도(態度)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는 내용이다. 독립선언서와 비교해 보면 ‘공약삼장(公約三章)’의 문체가 단호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미년(1919) 3·1독립운동에 있어서 독립선언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는 평가가 대체적이다. 3·1독립운동의 정신은 ‘독립선언서’의 말미에 나오는 ‘공약삼장(公約三章)’으로 압축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공약삼장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 김상현 교수는 “선언서가 눈이라면 짤막한 이 공약삼장은 눈동자다”라며 “눈동자가 있어 눈을 눈답게 하듯, 공약삼장이 있어서 독립선언서가 선언서다운 구실을 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공약삼장(公約三章)’에서는 첫째, ‘독립’을 민족의 요구로써 오직 자유적 정신의 발로(發露)임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란 표현의 의미는 비교적 우회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독립선언서’의 내용에 비해 보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함축한 행동강령이다. 셋째, ‘질서를 존중하라’는 주문은 곧 작금의 독립운동에서 관철된 비폭력 정신을 표방한 것이다. 이 비폭력은 독립운동에서 핵심적 특징이다.

이런 중요한 ‘공약삼장(公約三章)’의 작성을 두고 만해 한용운에 의해 작성됐다는 것이 학계 대부분의 통설이지만, 일부 의견은 독립선언서뿐만 아니라 공약삼장도 육당 최남선이 썼다는 반론이 있기도 했다. 문인 조용만이 1969년 3월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공약삼장은 만해가 쓴 것이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의 작품”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했다. 이후 신용하 교수(1977), 홍일식 교수(1989) 등이 공약삼장의 작성자가 육당 최남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난 2019년,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공약삼장’은 만해 한용운이 아닌 최남선이 작성한 것이라고 다시 반박하고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만해 한용운이 썼다는 의견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평가다.

이렇게 ‘공약삼장(公約三章)’의 작성자에 대한 논란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3·1 독립운동에 있어서 공약삼장의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에 마침표를 찍기보다는 다시 한번 이 주장에 반론해 역사적 정황과 증언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민족대표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갑성(1889~1981)이 1969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에 “축배를 들려할 때 승려 한용운이 일어서 선언문 낭독과 조선 독립 만세를 선창, ……그때 민족 대표의 의기가 대단했다. ……한용운은 대단한 인물이었어요. 독립선언서가 최남선에 의해 작성, 그 원고가 최린 댁 안방 가야금에 비밀히 숨겨져 있을 때에 선언서를 자기 손으로 쓰겠다고 버티던 옹고집이 생각나요. 끝내 공약삼장을 추서(追書)했던 그는, 마포 감옥에 수용됐던 시절에는 인원 점검 때면 대답 대신 고개를 외로 꼬았어요.”라고 증언한 내용이다.

만해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자기 손으로 쓰겠다고 주장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최린은 자서전에서, 최남선이 “일생을 통하여 학자 생활로 관철하려고 이미 결심한 바 있으므로 독립운동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으나 글을 읽는 나로서 독립선언문만은 내가 지어볼까 하는데, 그 제작 책임은 형이 져야 한다.”면서 책임 전가를 요구했다고 했다. 그에 대해 만해 한용운은 독립운동을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 선언문을 짓는 것은 불가하므로 자신이 짓겠다고 주장했지만, 최린이 생각하기에 누가 책임을 지던 간에 선언문만은 육당이 짓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만해 한용운의 이의를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역사적 진술과 증언들을 바탕으로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독립운동사’에 3·1운동 관계기록이 나온다. “한용운은 천도교 독립선언서에 공약삼장을 추가했으며,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의 연설을 하고 만세를 선창하는 등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금 전하는 독립선언서 뒤에 붙은 공약삼장은 한용운이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

공약삼장의 내용에 있어서 독립선언서의 문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독립선언서가 적극성을 띠지 못한 데 비해, 공약삼장은 적극적이고 상당히 진취적 기상이 돋보인다. 독립선언서 작성 책임을 지지 않으려던 소극적인 최남선의 모습과는 달리 두 번째 내용인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사의를 쾌히 발표하라”는 표현은 매우 적극적이고 단호하다. 최린이 최남선에게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의하자 최남선 자신은 문학을 연구하므로 독립운동에 참가할 수 없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조차 서명하기를 꺼려했다. 이렇게 민족의 독립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최남선이 자주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의 표현을 담고 있는 ‘공약삼장’을 썼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동양학 교수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는 공약삼장을 <독립선언서>의 ‘눈동자’뿐만 아니라 “불교의 해탈, 불살생, 박애, 보편도덕주의 정신을 끝까지 지켜온 한용운이 자유 비폭력 세계주의를 골자로 하는 ‘공약삼장’의 필자였다고 보는 편이 가장 자연스럽고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여러 가지 정황과 증언을 종합해볼 때, ‘공약삼장(公約三章)’은 만해 한용운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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