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말살한 정겨운 옛 고유지명 되찾은 강릉 왕산면
상태바
일제가 말살한 정겨운 옛 고유지명 되찾은 강릉 왕산면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5.06.25 15: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복70주년 기획-일제에 빼앗긴 고유지명 되찾기
지명역사 1000년 홍주 고유지명 되찾자

 

왕산면 주민들은 서명운동과 조례제정을 통해 100년만에 옛 지명 왕(王) 자를 되찾았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바꾼 지명을 주민들이 100년 만에 되찾은 대표적인 곳이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이다. 강릉시 왕산면(旺山面)의 주민들은 ‘왕산면(王山面)’으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한 ‘한자(漢字) 명칭 변경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지명을 바꿨다고 한다. 왕산면 주민들은 광복 이후 광복회와 함께 본래 한자표기를 되찾는 등 일제 잔재 청산을 줄기차게 요구했던 결과라고 설명한다. 지난 2007년 6월 행정구역 명칭정비를 강릉시에 요구한 데 이어, 마을 이장들이 중심이 돼 전체 주민들이 옛 지명 되찾기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등의 운동을 벌여 본래의 지명을 찾았다. 강릉시 왕산면(旺山面)의 본래 지명은 ‘임금의 땅(산)’이라는 의미를 담은 왕산(王山)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왕산면의 ‘임금 왕(王)’자가 ‘일본(日)의 왕(王)’을 뜻하는 ‘성할 왕(旺)자’로 바뀌어 ‘旺山面’이라는 지명이 지난 100년 동안 사용돼 왔다. 당시 민족정기를 말살키 위한 일본의 조치였다는 것이 주민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강원도의 항토사료를 찾아보면, 왕산면 지명의 유래는 14세기 고려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32대 임금인 우왕(1365~1389)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1335~1408) 등 신진세력에 의해 대기리와 왕산리 사이 해발 840m 대관령 산기슭에 유배됐다. 주민들은 이곳을 왕이 머물던 곳이라 해 ‘제왕산(帝王山)’이라 불렀고, 이후 마을 이름이 왕산(王山)이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것이다. 당시 일제는 민족정기를 말살키 위해 우리 지명에 쓰이던 ‘왕(王)’을 ‘황(皇)’ 또는 ‘왕(旺)’으로 바꿔 놓거나, 지역의 특성과 역사성을 담지 않은 채 남면(南面), 동면(東面) 등 방위만 표시한 행정구역으로 지명을 변경해 버렸다. 하지만 일제는 1914년 조선총독부령으로 임금왕(王)에 일왕을 상징하는 ‘日’자가 있는 ‘왕산(旺山)’으로 지명을 일방적으로 바꿔버렸다.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제국주의 사상을 침투시키기 위한 속셈이었다. 일제는 같은 맥락으로 강릉시 연곡면 ‘신왕리(新王里)’ 지명도 일왕을 상징하는 단어를 사용한 ‘新旺里’로, ‘앞목항’은 일본인들이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안목항’으로 개악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왕산면이 일본의 왕을 뜻하는 왕 (旺)자를 본래의 임금 왕(王)자로 바꿨는데 아직 왕산중학교의 교문패는 바꾸지 않았다.

왕산면 주민들은 마을 이장들이 중심이 돼 전체 주민 1703명 가운데 60%에 가까운 1000여명이 옛 지명 찾기 서명운동에 참여해 옛 지명을 되찾았다. 김준태(59) 왕산면 이장협의회장은 “지난 100년 동안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한자 명칭을 사용한 것이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이제라도 본래 이름을 되찾아 사용하게 돼 매우 감격스럽다”면서 “이번 왕산이란 옛 명칭으로 변경을 계기로 주민들이 더욱 합심해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강릉시는 정부의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명칭 정비 추진계획’에 근거, 왕산면의 한자표기를 원래대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해 왔듯이 “왕산면의 사례는 일제 잔재 청산의 의미는 물론 주민의 자긍심과 애향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이를 계기로 연곡면 신왕리(新旺里)의 명칭도 본래 한자표기인 옛 지명을 찾기 위해 ‘新王里’로 변경하기 위한 주민의견을 수렴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왕산면 현지에는 왕산면(王山面)으로 변경한 표지석이 있는 반면 면소재지에 자리하고 있는 왕산중학교(旺山中學校)의 정문에 박혀 있는 교패는 예전의 그대로‘旺山中學校’였다.

이와 관련 손동오 왕산면장은 “암반데기 등 고랭지채소를 주로 재배하는 지역인데 올해는 가뭄이 심해 가뭄극복에 주민들이 매달려 있는 실정”이라며 “아직 지명이 바뀐 지 1년 정도 되는 관계로 우선 공공기관부터 교체하고 있다. 국도 35호변 왕산사라는 절 등 공공기관 이외의 표지석은 계속해서 교체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고 “왕산중학교 정문의 교패는 학교 측과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왕산중학교(旺山中學校) 정문의 교패에 관련해 이 학교 이진섭 교무부장은 “지명이 바뀔 당시 교체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사실 생각을 못했다”며 “협의해서 바로 교체하고 가능하면 한글로 바꿔야 하겠다”고 밝혔다.


강원도의 정감 넘치는 옛 마을이름, 마을의 특징 잘 간직해

 


춘천시 신북읍에 유포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냇가에 버들이 많다 하여 ‘버들개’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漢字)로 표기하면 ‘유포리(柳浦里)’가 된다. 또한 강릉시 강동면에는 임곡리(林谷里)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숲이 우거져 ‘숲실’또는 ‘밤나무쟁이’로도 불리고 있다. 이처럼 전국에는 ‘버들개’나 ‘숲실’과 같이 마을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정감 넘치는 옛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 많다. 평창에 있는 응암리(鷹岩里)는 원래 ‘매화’로 불리었다. 여기서 ‘응(鷹)’은 새 매를 의미하니까, 이 마을은 매에 얽힌 사연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피해 마을 동굴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매를 이용해 바깥세상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매가 자주 드나드는 것을 수상히 여긴 왜군에게 발각돼 화를 입고 만다. 훗날 ‘매로 인해 화를 입었다’하여 마을이름이 ‘매화’가 됐다는 얘기다. 어쨌든 평창군 응암리 역시 새 매와 바위를 뜻하니까 ‘매가 많은 바위’를 이르는 셈이다. 춘천 신북읍 유포1리에는 ‘아침못’이라는 마을과 저수지가 있다.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버들냇가 유포(柳浦)라 했으며, 버들개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보면 영동지방에 편재 되어있기도 하다. 아침못이 있는 유포1리는 85가구가 살면서 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산다. 아침못에서 5월초 순부터 물 빼기를 시작, 논에 물을 골고루 대주고 있어 가뭄에도 물 걱정은 안 한다고 한다. 하지만 올해엔 계속되는 가뭄으로 아침못인 조연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농심을 태우고 있다.

이곳 유포리에 전해 내려오는 아침못 전설을 한 번 들어본다. 춘천 신북면 버들개에 부자보다 더한 장자가 살았는데 얼마나 인색하고 구두쇠인지 앉은자리 풀도 안 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 하루는 장자의 집에 고승이 와서 시주를 청하니 마침 마구를 치고 있던 장자는 쇠똥을 고승에게 끼얹으며 내 쫒으려고 하자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며느리가 시아버지 몰래 고승을 불러 쌀 한 말을 퍼 주면서 노인네가 망령기가 있어서 그러니 노여워 말라며 고승을 달랬다. 고승은 며느리에게 내일아침 뇌성벽력이 치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집을 빠져 나오라고 일러주고 떠난다. 다음 날 벼락을 치며 비가 쏟아지자 며느리는 집을 뛰쳐나오다 뇌성에 뒤를 돌아보니 큰 기와집이 있던 자리에 집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못이 생겼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못이 되었다고 해서 아침조(朝)자, 못 연(淵)자라 하여 ‘조연저수지<사진>’라고도 불리고 있다. 부자집터 만큼 컸던 연못은 이후 일제시대 5년에 걸쳐 순전히 삽과 곡괭이, 흙수레만으로 확장공사를 하여 지금의 저수지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결국 장자못이라고도 불리는 아침못은 저수지속에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 유포1리 마을회관(아침못경로당)에서 만난 동내 어른들의 증언이다. 결국 눈앞의 단맛을 추구하는 우리의 조급증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우리의 발등을 찍는다는 진리는 이 설화와 같이 오로지 내 것만 집착하는 현대인에게 남을 배려하고 상부상조 정신으로 나누는 미덕을 실천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