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5>
홍운 김창수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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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5>
홍운 김창수 서예가
  • 장윤수·김현선 기자
  • 승인 2015.07.20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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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운 김창수 서예가
홍운 김창수 서예가.

강남의 은마아파트 옆, 쭉 뻗은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묵향이 그윽한 서화실이 나온다. 30년 동안 지켜온 그 곳 ‘홍운서화실’에서 서예가 홍운(弘雲) 김창수(64) 선생을 만났다. 문인화를 그리는 아내 청랑 김근회 화백과 함께, 그는 이곳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 세월만큼이나 은은하고도 깊은 묵향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홍운 선생은 어렸을 적부터 좋은 글씨를 보면 마음도 덩달아 좋아졌다고 한다. “새해가 되면 신문마다 신년휘호가 크게 실리곤 했어요.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주변에는 손으로 직접 쓴 글씨를 내건 곳도 많았고요.” 그는 맘에 드는 글씨를 직접 따라 써보기도 했던 어린 시절을 추억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온 그는 일반교육과정과 더불어, 한학을 배우기도 했다. 좋아서 한 일이었기에, 생업을 가진 후에도 관심은 서예로 향했다. 각종 서예대전에서 특선, 우수상 등 좋은 성적을 얻으며 서예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그는, 1986년 이곳 대치동에 ‘홍운서화실’을 열며 오로지 서예가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탁본에 관심이 많은 홍운 선생 작업실의 책들.

작업실 한쪽 벽면에는 그가 직접 쓴 서예작품과 함께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아내인 김근회 화백을 비롯해 세 딸과 함께 금서슬화가족전을 준비하며 찍은 것이다. 5년 전, 결혼 30주년이자 환갑을 맞은 그에게 가족들이 축하의 의미로 모두 함께 전시회를 연 것이다. 주제를 부채전으로 정하고 온 가족이 부채 작품으로 전시를 하였는데 그 중에는 아내가 그림을 그리고, 남편은 화제를 쓴 합작품도 있었다. 당시 이 가족전은 서예계의 큰 주목을 받았는데 한 평론가는 ‘서예계에서 또한 대한민국에서 처음 있는 아름다운 1호 가족전’ 으로 손꼽기도 했다. 인터뷰 당일, 홍성에서 올라온 친구들을 만나고 왔다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일년 중 한 번쯤은 이렇게 서울에 모여 우정을 나눈다고 한다. 홍성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그는 홍성중학교 동기들과 등산모임도 하며 여전히 변치 않는 우정을 지켜오고 있다.

그는 몇 해 전부터는 주말이면 꼭 홍성에 간다. 금요일마다 홍성문화원에서 하는 ‘한문한글서예’ 교실에 출강을 하기 때문이다. 그가 서울에서부터 홍성까지 먼 길을 마다 않고 내려오는 이유는 고향을 위한 봉사로 홍성에서 서예의 저변을 넓히고 싶기 때문이다. “홍성 바로 옆에 있는 예산만 보더라도 서예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추사 김정희선생 추모전국휘호대회를 매년 열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홍성은 서예에 대한 관심도가 낮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얼마 전 신문기사를 보니 홍성에 골프인구가 25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럼 서예인구는 얼마나 될까요? 아마 골프인구보다 적을 것 같습니다.”그는 홍성이 내로라하는 인물을 배출한 지역임에도 제대로 그 정신문화유산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고 말한다. “강원도 인제에서는 만해 선사를 기리며 휘호대회를 크게 해요. 그런데 홍성은 만해가 태어난 곳인데, 그런 움직임이 별로 없죠. 홍주 지명 찾기라든가, 홍주 천 년을 요즘 많이 얘기하는데, 어떻게 무엇을 해야 그 천 년의 값어치가 있는지를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

홍운 선생의 글씨와 붓.

그는 자신이 한 말처럼 홍성의 정신문화유산을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찾으려 직접 움직인다. 탁본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서예가로서 전각과 금석문 탁본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주말이면 홍성의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며 탁본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금석문 탁본은 그저 본을 뜨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비문에는 지금은 쓰지 않는 한자도 많을뿐더러, 한자의 의미를 문장 속에서 정확히 해석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금석문 탁본은 육안으로 보기 힘든 세밀한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게 해준다. 때문에 역사를 고증해내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하며, 문화재 훼손에 대비해 원형을 보존하는 역할도 한다. 그가 고향의 금석문 탁본작업에 매달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금석이라는 게 풍화작용에 의해서 마모가 되잖아요. 백 년 만 되어도 부식이 되어 알아보기 힘든 비석도 있습니다. 앞으로 50년이 더 지나면 아예 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죠. 그럼 그냥 돌덩어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전 탁본을 떠 놓는다면 당시의 기록을 오래도록 남길 수 있게 되는 거죠. 비문 몇 글자에 따라 역사적 사실이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역사 연구에 중요합니다.”

그는 직접 최원직의 묘비를 탁본한 것을 꺼내어 설명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는 말을 원래 누가 한 지 아십니까? 그 말은 최영 장군의 아버지인 최원직이 자식이 청렴결백하고 훌륭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한 평소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날 공직자들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홍성의 역사 인물로 최영 장군을 가장 첫 번으로 꼽기에, 이 탁본을 뜨게 됐습니다.” 그는 홍성을 시작으로, 옛 홍주 관할에 이르는 지역의 금석문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홍주금석문대계를 만들고 싶어요. 홍성을 시작으로, 그 다음에는 예산, 서천, 보령 등 옛 홍주 관할지역으로 점차 넓혀나갈 계획입니다.” 그는 내년 즈음엔 홍성지역에서의 작업을 끝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물론 제 머리 속의 계획입니다. 주말에만 홍성에 내려가 작업을 하다보니 일의 진전이 빠르지는 않지만 꾸준히 해나갈 계획입니다.”

그는 이 금석문대계를 비롯해 홍성에서 서예와 금석학 연구를 위한 단체와 모임을 만들 구상도 가지고 있다. 이미 ‘홍주연서회(洪州硏書會)’ 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글씨를 연마한다는 뜻으로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문화원에서 수업하고 있는 것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금석문대계’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내포문화연구원’을 준비 중이다. 홍성의 역사문화유산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그의 노력은 한편으론 절실해 보였다. 서울에서부터 홍성까지 짧지 않은 거리를 매주 내려오기는 쉽지 않을 터. 더군다나 그 시간의 대부분을 서예를 가르치는 일과 탁본 작업에 매달리는 그였다. “홍성사람이니까요”라고 담담히 말하는 그의 말에서 고향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에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은 그의 마음이 전해졌다.
 


홍운 김창수  서예가는…       
서예가 홍운 김창수 선생은 구항면 지정리에서 태어나 대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성중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출향했다. 월당 홍진표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초정 권창륜 선생으로부터 서예를 사사했다. 197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첫 입선했으며, 동아미술제 특선, 전국휘호대회 우수상(KBS), 국제서법대전 동장(북경) 및 은장(서울)을 받았으며 지난 2010년에는 제 5대 국새모형공모에서 우수작에 입상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으며 각종 서예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현재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와 일월서단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고, 강남구 대치동에서 홍운서화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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