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9>
산정 시우미 시인
상태바
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9>
산정 시우미 시인
  • 장윤수·김현선 기자
  • 승인 2015.08.06 11: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정 시우미 시인
산정 시우미 시인.

“어린 시절 저희 가족은 동문이라고 불리던 지금의 조양문 바로 옆에서 살았습니다. 유난히 보수적인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인성교육을 받으며 자랐죠.” 장맛비가 땅을 촉촉히 적시던 여름날, 서울의 광화문 근교에서 홍성 출신 산정(山井) 시우미(73) 시인을 만났다. 시인은 홍성읍 오관리에서 보낸 아련한 어린 시절을 추억해냈다. 시인은 어릴 적부터 그림그리기와 글짓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이승만 박사 생신을 맞아 백일장 대회에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작문을 쓴 것이 충남에서 대상을 탔었죠.” 시인은 글 솜씨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학창시절에 충청남도 미술대회에 참가하여 특선에 입상하였고, 고등학교 때 어느 날은 조양문 앞에 서서 커다란 이젤을 펴놓고 그림을 그렸는데, 지역주민들이 시인을 둘러싼 채 구경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의 남편인 윤항중(75) 예비역 육군 소장은 당시 홍성고 3학년이었는데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 그림을 그리는 시인의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고 말했다.

시우미 시인은 지난 1968년, 윤항중 대위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한국일보 제1회 주부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꿈을 잠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전후방을 오고가는 군인가족으로서, 남편을 내조하며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던 글과 그림 모두를 내려놓고, 40여 년 간 집안일에 전념해야만 했던 것이다. 시인은 “어린 시절엔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온갖 호강을 하며 자랐다”면서 “결혼 후엔 군인가족으로서 누구보다도 다복했었다”고 말했다. 이어 “훌륭하고 좋은 남편에 아들 형제도 나무랄 데가 없어서 속 썩을 일이 없었다”며 “그야말로 누가 봐도 복을 타고난 인생이었다”고 회상했다. 시인은 “남편은 군 생활을 하며 어느 위치에 있던지 애국애족의 사명으로 국방의 의무에 최선을 다해 장군으로 진급되는 영광을 안았고, 육군 소장으로 진급되기까지 군인가족으로서 열정적으로 살아가며 행복했다”고 말했다. “남편은 올바른 국가관과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다는 투철한 조국애를 지닌 사람으로 국방의 의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치적인 희생양이 돼 명예전역을 당했고, 설상가상으로 보증을 선 것이 잘못돼 급작스레 엄청난 빚더미를 떠안게 됐죠.”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해 왔지만, 아픔을 겪은 이후 시인은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시우미 시인(사진 왼쪽)과 남편 윤항중 예비역 장군의 현역 시절 모습.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공과금 하나도 제 때 못 내면 스스로 못 견디는 성격인데, 갑자기 모든 것을 다 잃고 빚진 죄인이 되니 모든 것을 잃은 충격과 자존심 손상으로 인한 그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결국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시인은 빚을 진 이후 대인기피증, 피해망상증, 협심증, 원형탈모증, 불면증, 우울증 등으로 피폐한 삶을 살게 됐고 심지어 유방암이라는 큰 병까지 얻게 됐다. 그런 그녀를 남편인 윤 장군은 헌신적으로 간호했다고 한다. 시인은 투병 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는 날까지 글을 쓰며 보람 있게 살리라”는 다짐을 했고, 기독교인으로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시인은 “폭풍우 같은 세월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역경의 시간을 견뎌내며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글을 썼다”고 말했다.

그렇게 지난 힘든 나날에 시인은 200여 편이 넘는 수필과 200여 편의 시와 26권의 일기장을 썼고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시인은 “시의 향기로 괴로움을 토해냈고, 시가 고통을 승화시키는 카타르시스가 됐기 때문에, 좌절과 고통과 고난의 시간에도 비상이 가능했고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려움을 당하며 힘들어서 울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죠. 메마른 가슴에 폭포수 같은 서정이 흘러내리게 해 폭압의 시기에도 당당히 존재했습니다. 그 아픔들이 작품으로 승화돼 지금의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노력의 산물로 시인은 지난 2008년 수필가로, 2009년에는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리고 유방암 판정을 받으면서 유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을 담은 수필집, ‘겨울나무’를 2010년 출간했고, 이어 2013년에는 시집, ‘삶의 무늬’를 출간했다. 시인은 시집 머리의 ‘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이 왜 글을 써야했는지를 표현했다. 시우미 시인은 올해 안에 제2 시집과 제2 수필집을 내놓을 예정이다.

“나의 문학은 내 삶의 표현이자 흔적이며, 제2 인생을 사는 구원입니다. 내가 살아가며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을, 치열한 정신으로 극복해 나가며 써왔던 글은, 나의 이상을 지향하는 열정의 표현물입니다.” 시인의 말대로, 그의 작품들은 ‘제2 인생을 사는 구원’이 됐고, 그녀는 현재 암에서 완쾌돼 하루하루를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한 지난 2009년에는 남편도 수필가로 등단했으며 부부가 각자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남편 윤 장군은 지난 1995년 전역 당시 ‘아들아! 나는 청춘을 군인으로 살았다’라는 수필집을 발간해 국방 진중문고로 선정돼 전 군에 보급된 바 있다. 또한 현재 시우미 부부 작가는 (사)한반도 평화통일촉진 문학인으로 순수문학 활동을 통해 남북 평화통일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시인에 따르면, 부부의 통일 시는 “그대로 남북을 오가며 울고 있는 바람의 소리이며 우리 겨레의 한결같은 바람(望)의 소리”라는 설명이다.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우리 부부의 글이, 남북을 오가며 울고 있는 큰 바람의 소리가 돼 이념의 바람, 서로를 미워하는 증오의 바람을 다 잠재울 수 있었으면 하는 또 하나의 사명과 염원을 담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시우미 시집 ‘삶의 무늬’.

자신을 “뒤늦게 문학의 뜨락에 둥지를 튼 꿈 새”라고 설명하는 시우미 시인은 “글 쓰는 일은 절실하고도 필수적인 표현욕구의 충족을 위한 문학적 행위임을 자각하며 ‘시’라는 영혼의 깊은 늪에 빠져 들어가야한다”고 말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저를 지탱해준 것은 문학이었습니다. 지금도 글을 쓰는 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이제 추위와 어둠을 걷어 내고 밝게 웃는 푸른 세상에서 다시 살고 싶습니다.” 시우미 시인의 간절한 바람이자 외침이다. “주어진 하루하루 저녁노을을 보며 남은 삶을 추스르는 의지로, 다시 피는 들꽃으로 생명의 내홍을 환희로 치환하는 여인의 남은 자존심, 세상을 향하여 ‘나 죽지 않았다’고 내 사색의 향기 날리며 내내 글을 쓰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시우미 시인, 시인은 “다시 태어나도 시인다운 삶, 참으로 문인다운 삶을 살고 싶다”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산정(山井) 시우미 시인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예비역 육군 소장 윤항중(육사 21기, 홍성 출신)의 부인이며, 한국일보 제1회 주부백일장에서 시 부 장원(1968), ‘주부생활’을 통해 작품 활동(1960년대)을 했으며, ‘조선문학’에서 수필가와 시인으로 등단했다. 파블로 네루다 탄신 105주년기념 수필부문에서 최우수상(문예춘추)을 수상했으며, 한울문학 수필부문 대상, 2013 제31회 동백문학상(시 부문)을 수상했다. 현재는 조선문학 문인회 회원, 문예비전 문인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울문인협회 회원, 책과 인생 문인회 회원,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 등으로 활동 중이며, 수필집 ‘겨울나무(2010)’와 시집 ‘삶의 무늬(2013)’를 출간했다. 또 2010년에는 올해의 존경받는 인물 대상(문화인 부문·시사투데이)과 2010 제18회 대한민국 문학대상(주식회사 연예정보신문사)을 수상했으며, 현재 (주)이앤아이월드 고문으로 재직 중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