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성 전투에서 일본군 격파 첫 승전고 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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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성 전투에서 일본군 격파 첫 승전고 울리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6.3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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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10>

비인-판교 거쳐 남포성 입성 때 의병 1만 여명으로 증가
민종식 의진 남포성 나와 보령 거쳐 5월 19일 홍주성 쳐
홍주성함락 체포의병 대마도 유배 ‘홍주의병 대마도9의사’
홍주의병 남포성 5일 전투, 치열한 싸움 끝 첫 승리 거둬

 

▲ 남포성 전투에서 첫 승전고를 울린 관아문. 아래층은 출입구 역할을 했고, 관아문의 누각에는 진서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남포성은 둘레 2476척, 높이 10척의 석축성이다.

나라를 구한 의병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참으로 야릇하게 아파온다.
옛 흔적을 찾아 가는 곳마다 잡목과 수풀로 우거진 현장이고 보면 씁쓸함에 입맛이 쓰다. 또 다른 쓴맛은 민병(民兵)인 의병(義兵)은 조련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제대로 편제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높은 뜻과 기개를 무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크고 작은 전투 경험에서 자신감이 생기고, 자생적 결집력과 전투를 통한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조련됐다. 전투를 하면서 본능적으로 편제도 갖추게 됐다. 이렇듯 의병의 창의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 참판 민종식은 1906년 3월경부터 이용규(李容珪), 이세영(李世永), 채광묵(蔡光默)등과 함께 의거를 계획했다.
안병찬, 최익현 등과도 연락하며, 충청남도와 전라도 일대의 전직관리와 유생들을 규합하는 한편 군용품을 수집했다. 그해 5월 11일에 이용규, 김광우, 조희수, 정재호, 황영수, 이세영, 이상구 등은 홍산(鴻山)에 모여 의거를 최종 결의하고 의군을 출동시켰던 것이다. 민종식 의병진은 서천의 구병동과 문장동을 거쳐 서천에 입성했다. 부여 지치(芝峙)에서 창의하여 대장기(大將旗)를 세운 의병들은 이렇게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의병들은 홍산을 공략하고 서천(舒川)을 함락하면서 강화된 전력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기가 높아지면서 채 300명에도 미치지 못했던 의병의 수가 1000여명으로 늘어났고, 신식병기도 전리품으로 얻게 됐다. 서천에서는 양총(洋銃) 20자루를 전리품으로 획득해 병기를 보강할 수 있었고 이에 사기도 충천했다. 이런 결과일까. 의병의 수도 2000명을 헤아리게 됐을 정도로 불어났다. 이후 비인(庇仁)을 지나 판교를 거쳐 남포(藍浦)에 입성하였을 때는 의병의 수가 1만 여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천과 남포에서 많은 화약과 총포, 탄약을 접수하고, 서천군수 이종석과 남포군수 서상희(徐相喜)를 체포, 구금했다. 일본군과도 접전을 벌여 그들을 격퇴시키고 3명을 생포하기까지 하기도 했다. 한편 잠시 잡아 가두었다가 석방한 서천군수 이종석은 일본군에게 ‘도적’이라 보고 하여 일본군들이 민종식 의병진이 주둔한 남포성으로 쳐들어 왔다. 이에 민종식 의병은 갑자기 받은 일본군의 공격에 처음에는 주춤거렸으나 이내 600여명의 의병들을 성벽에 배치하고 맹렬한 포격을 가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을 격퇴하고 5~6명을 생포했던 것이다. 이 공격을 막아낸 민종식 의병은 곧 이곳의 친일 군수인 서상희를 감금하고 병력을 증가하는 한편 근처의 마을들을 습격하여 일본인 3명을 추가로 생포했던 것이다. 군량은 남포군에서 정부에 바칠 쌀 25석으로 충당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군량의 충당이었다. 이후 민종식 의진은 남포성을 나와 다시 보령을 거쳐, 홍주부로 향했는데, 결성(結城)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5월 19일(음력 4월 26일) 먼저 100여명의 선발대에게 구식 화포 6문을 주어 홍주성을 치도록 했다. 한편 청양에서도 100여명의 지원부대가 홍주성으로 진격했다. 이로써 민종식 의병은 홍주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대항하는 일본군을 일거에 격파하면서 홍주성으로 진격했다.

▲ 남포현관아 옥산아문. 안에는 동헌이 있다.

■유준근 유병장 홍주의병 대마도 9의사
남포에 진을 치고 있던 민종식은 현재의 보령시(保寧市)에 살고 있던 유병장(儒兵將, 유생들을 이끄는 장수) 유준근과 구국 전략을 의논하기도 했다. 유준근은 을사 5조약이 있은 후에 세금을 받으러 다니는 관리들에게 “전곡갑병(錢穀甲兵)이 모두 저 오랑캐의 것이 되었는데 너희들은 세금을 누구에게 바치려는 것이냐?”고 호통을 치면서 납세를 거부하여 크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할 만큼 침략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남포의진 중에는 민종식의 초청을 받아 병중에도 불구하고 종군하였는데, 당시 일본군과 관군 측에서는 왕의 명을 빙자하고 의병들의 해산을 종용하며 서로 담판을 벌이기로 했다. 그런데 의진에서 사람을 보내면 적측에서는 의병진의 담판 사절을 가두고 보내지 않는 것을 유준근이 적의 진중으로 직접 들어가서 의리로 따져 적의 기개를 꺾었고, 드디어 결박해 있던 의병을 놓아 줌으로써 함께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렇듯 1906년(병오년) 민종식이 홍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남포읍성에 머물면서 유준근을 불렀던 것이다.
병중이었지만 기꺼이 의병진에 가담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의사는 유병장(儒兵將)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당시 다른 의병진에서는 볼 수 없는 유병장의 소임은 항일 유림들 사이에서 얼마나 명망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군의 야습으로 홍주성의 성문이 파괴되면서 성이 무너지자 의병장 이하 모두 피신하기에 급급했지만, 유준근 유병장은 피신하지 않고 침착하게 의병관련 기록을 소각한 후 왜적에게 당당하게 체포됐다.
가담자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체포된 의병들에게는 왜병들의 가혹한 심문이 행해졌는데, 이때 유준근 유병장이 나서 “가담자는 나와 몇 사람뿐이니 우리를 처벌하고 모두 돌려보내라”고 호통을 쳐 많은 사람들이 석방되었다. 이후 유준근 유병장은 다른 주동자 82명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다른 8명과 함께 일본 대마도로 유배됐다. 낮선 이국땅에서 4년을 지내는 동안 일본사람이 주는 옷은 끝내 입지 않았으며, 모두 강제노동을 당했지만 마당에 내려가 풀 한 포기도 뽑지 않았다. 이때 면암 최익현도 대마도에 유배돼 함께 있었는데, 유준근 유병장은 소학(小學)을 가지고 배움을 청했고 제자의 예를 갖췄으며, 면암의 병이 깊어지자 자식과 같이 주야로 간호했다. 1909년 고국에 돌아온 후 늦게 아들을 낳았으나 일제의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경찰서에 불려가 온갖 협박을 당했지만 끝까지 입적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유준근은 보령 내항동 녹문 출신으로 홍주성이 함락되자 체포돼 무기형을 선고받고 다른 8명과 함께 대마도에 유배형을 당했다. 이들을 ‘홍주의병 대마도 9의사’라고 하며, 유준근 유병장은 9의사 중 가장 긴 4년여 동안 대마도 이즈하라의 하치만구신사 부근과 경비대에서 유배생활 끝에 1909년 귀국했다. ‘마도일기(馬島日記)’를 남겼으며, 파리장서운동 등 항일운동에 전념하다가 1920년 내항동 녹문에서 사망했다. 묘소는 보령 청소면 신송리 고잠마을에 있다.
손자인 유긍수 씨(80)는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고초를 겪은 조부의 행적이 현장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음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면서 “대마도에 유준근 열사의 유배 사실을 알리는 표석이라도 세워 후세에 알렸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밝혔다.

■남포성 홍주성 가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
남포성(藍浦城)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었다. 충남의 서남부에서 홍주성(洪州城)으로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아군의 수중에 넣어야 하는 비중 있는 성(城)이었다. 충청도 내포지방의 경계는 차령산맥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차령산맥을 오른쪽으로 끼고 내포지방의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길목에 남포성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남포성(藍浦城)은 전략적으로 또 다른 중요성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석축과 성곽이 남아 있을 정도로 예부터 변방수비에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조선조 태조 6년(1437년)에 병마사(兵馬使)를 두어 현사(縣事)를 겸하게 했다가 세조 12년(1466년)에 진을 없애고 현(縣)을 두었던 곳이다. 현재의 남포성은 보령시에서 서천으로 향하는 외곽도로 종점부근과 옛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아름드리 노송(老松)이 어우러지며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중반까지만 해도 성밖의 바다와 인접해 있던 곳이다. 이곳에 성축을 쌓고 병마사를 두면서 진을 세운 것을 보면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잇게 한다. 실제로 왜구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이곳에 성을 쌓았던 것이다. 따라서 남포성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다 쪽 야산(野山)은 거의 대부분이 산성(山城)을 품고 있으며, 지금도 그 유허가 상당부분 남아있다.  이를 모두 합쳐 남포장성(藍浦長城)이라 부르고 있다.
홍주의병의 남포성 전투는 5일 동안의 치열한 싸움 끝에 공주병력과 합세, 첫 승리를 거뒀다. 예산 광시에서 첫 거병한 의병들이 청양 화성에서의 첫 패배로 와해된 이후 부여 지치에서 재차 거병해 홍주성으로 진격해 가는 과정에서의 대일본군(對日本軍)과의 첫 승전보였으며, 이는 홍주성(洪州城) 탈환의 승리를 위한 전주곡이기도 했다.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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