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예술혼 오롯한 전통의 숨결 ‘추사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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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예술혼 오롯한 전통의 숨결 ‘추사고택’
  • 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8.0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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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3>
▲ 추사고택 안채 전경.

한옥, 역사와 문화를 모두 담아낸 문화의 결정체
53칸짜리 반가주택 월성위궁 1970년 반으로 복원
안채 ‘ㅁ’자 형태 대청 6칸 안방 2칸 건넌방 배치
추사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불세출의 명작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추사체로 유명한 서화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고택은 여름철인데도 고즈넉한 모습이다. 추사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추사체를 완성한 서예가로서의 업적인데, 그런 예술가라는 사실만 생각하면 가난한 선비가 연상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릴 수 있는 명문의 자손이었다. 경주 김 씨인 추사 가문이 세가를 이루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증조부가 영조의 딸인 화수옹주와 결혼해 부마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돼 경주 김 씨가 훈척 가문이 됐으며, 추사가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할 정도의 세도가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영조가 특히 화순옹주를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는 것. 화순옹주는 남편이 세상을 뜨자 상심해 식음을 전폐하며 시름시름 앓다 죽고 말았다. 그 때 영조는 왕명이라며 음식을 들라 했으나 듣지 않자 크게 노하며 상심했다고 전해진다. 추사는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금석학과 서체 등을 배웠으며, 순조 16년(1816)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밝혀내기도 했다.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헌종 2(1836)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며,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9년간 유배되었다가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렸다. 제주도에 지내면서 연구해 온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철종 2년(1851)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머물며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추사고택 안채 ㅁ자 구조의 공간미
우리의 한옥은 역사와 문화를 거의 모두 담아낸 문화의 결정체다.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추사고택도 마찬가지다. 이 고택은 추사 김정희가 여덟 살 무렵까지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추사는 장성해서도 이따금씩 이곳에 내려와 책을 읽었다고 하니 고택 안팎으로 추사의 체취가 넉넉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추사고택은 임금이 하사한 53칸짜리 반가주택인 월성위궁을 1970년에 반으로 줄여 복원한 것이다. 53칸의 건물 중 34칸만이 복원된 추사고택의 현재 모습은 여전히 그 시대의 삶과 건축을 우리에게 담담하게 전해 주고 있다. 추사고택이 현재 자리에 있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추사의 증조부로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이 주변 신료의 질시를 받아 서울에 있던 집을 옮겨 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영조가 직접 용궁리 일대의 땅을 하사하고 충청도의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의 건립비용을 염출해 53칸의 집을 지어 주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아무튼 추사고택 앞의 너른 마당에 다다르면 솟을 대문이 시야를 올려보도록 한다. 추사 김정희의 옛 집은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을 하고 있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도록 한 것이 특징적이다. 솟을 대문을 지나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가 오른쪽으로 약간 물러서 있고 그 너머로 안채의 윤곽이 조금 보인다. 너른 터에는 사랑채와 안채가 놓여 있는데 대문과 사랑채는 가깝지만 건물 좌측이 너른 마당으로 비워져 있어 평온한 기운이 감돈다. 오른쪽 후면에는 원래의 야트막한 자연지형이 그대로 있다. 후면으로 돌아가면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이 놓여 있고, 사당에서 우측 담장을 따라 오가는 경사 길에서는 담 밖의 자연스런 풍경이 고택과 어우러진다. 사랑채는 ㄱ자 평면으로 한 칸 대청을 사이에 두고 큰 사랑과 작은 사랑이 직교하고 있는데, 대청이 작고 방을 크게 두어 대청보다 방의 기능이 중시돼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한 구조다. 또 좁은 대청의 개방감을 얻기 위해 대청 쪽으로 난 문들을 모두 활짝 열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문짝을 내렸을 때의 보온과 폐쇄성을 위해서 문에 두꺼운 맹장지를 발랐고, 중간에는 빛이 통하도록 불발기창을 냈다. 또한 사랑채 전면은 툇마루가 바깥 켜를 이루며 빙 둘러쳐 있는데, 바닥 높이가 높아 루에 오르는 듯한 느낌이다. 따라서 건물도 높아져서 당당하고 권위적인 느낌이 들도록 건축한 것이 특징이다. 사랑채 기둥에는 추사 글씨의 주련 편액 등이 걸려 있고, 앞에는 추사가 ‘석년(石年)’이라고 글씨를 새겨 세운 돌이 있는데,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해시계이다.

안채는 ‘ㅁ’자 형태로 6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 그리고 건넌방이 배치돼 있어 짜임새 있는 공간미가 느껴진다. 안방과 건넌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장에는 다락이 설치돼 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6칸 대청은 비교적 큰 규모로서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의 상류층 주택에서 볼 수 있는 건축구조다. 사랑채와 안채로 이어지는 처마의 곡선은 추사의 예술혼을 대변하듯 산 능선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연미와 인공미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공간배치와 지붕의 곡선미가 돋보인다. 담장을 따라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고택 앞쪽으로 펼쳐진 시원스런 풍광이 시야에 들어온다. 고택이 위치해 있는 용궁리 주변지역은 무인의 기상은 엿볼 수 없지만 문인에게 어울리는 부드러운 형상을 하고 있다. 집터 앞쪽의 안산 또한 나지막한 야산이다.


 

▲ 추사고택 솟을대문.

■난치는 법 문자향과 서권기 갖춰야
고택에서 마을 안쪽에는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의 묘가 있고, 입구엔 추사가 연경에서 가져다 심은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이 있다. 고택의 옆에는 증조부인 김한신의 묘와 증조모인 화순옹주(영조의 딸)의 열녀정문이 있다. 조선 왕실에서 열녀정문이 있는 건 화순옹주가 유일하다는 것. 또 고택 인근엔 추사의 집안 사찰인 화암사가 있는데, 여기엔 추사가 바위에 새긴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는 암각이 유명하다.

추사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작품 ‘세한도(歲寒圖)’라는 불세출의 명작이다. 추사가 제주 귀양시절 임금이나 권세가가 글을 써 달라 하면 추사는 종이가 없다고 핑계를 댔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청나라와 유배지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 준 의리의 역관, 이상적에겐 아껴둔 좋은 종이 몇 장을 이어 붙여 세한도를 그려 줬던 추사였다. 국보급 서화인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역시 하인에게 그려준 것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1816년 7월, 비봉으로 알려진 북한산 꼭대기에 우뚝 솟은 비석 하나가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나 신라 도선국사의 비석쯤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비는 신라가 백제의 뒤통수를 치고 한강유역을 손에 넣은 뒤 그 업적을 새겨놓은 진흥왕순수비였던 것이다. 추사가 이끼로 덮여 있는 비석을 문지르자 글자의 흔적이 나타났고 그 글자들을 해독해 이 비의 정체를 밝혀냈던 것이다. 조선 사회에 금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일깨운 일대 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추사는 이 밖에도 문무왕비와 무장사비, 평백제비(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에 새겨놓은 기공문) 등 다수의 비문을 통해 고증학적 성과물을 내놓기도 했다.

한편 추사는 제주 유배시절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 난을 치는 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썼다. ‘예서법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 맑고 굳세며 고상하고 아담함)한 뜻이 들어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고, 청고고아한 뜻은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들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난을 치는 법은 예서와 가장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춘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 아무리 능수능란한 필력을 구사해도 학식과 덕망이 결여돼 있으면 저급한 손재주에 불과하다는 뜻임에랴. 옛 사람들의 생각과 이야기, 그들이 거닐었던 거리와 살았던 집들은 지금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늘 자연을 가까이 하며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았던 조상들의 삶이 부러워졌다면 이 여름에 고택을 찾는 것도 보람일 것임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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