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개와 선비의 고장 예산 한갓골, 수당고택(修堂古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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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와 선비의 고장 예산 한갓골, 수당고택(修堂古宅)
  • 글=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8.1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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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4>
▲ 수당고택 안채 전경.

수당(修堂) 이남규 등 4대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생을 바쳐
수당고택 사랑채가 안채보다 뒤쪽에, 들어가는 방향도 달라
대청마루와 연이어진 안방 뒤쪽에 재실(齋室)공간이 꾸며져
자연의 조화 깨지 않으면서 최대한 자연에 동화되도록 배려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방산저수지 아래 산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옛집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의 고택은 국가 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된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선생의 생가(生家)인 수당고택(修堂古宅)이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의 손자 이구(李久)의 부인이 1637년(인조 15년) 아계의 묘소 근처인 이곳에 건립했고, 1846년(헌종12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은 수당의 10대조인 한림공 이구(李久)가 1637년(인조15) 건립한 것으로 한림공의 부인 완산이씨 행장(行狀)에서 밝혀졌다. 1985년 이 가옥을 보수하면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1846년(헌종12)에 중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수당 이남규 선생을 비롯한 4대가 나라의 존엄과 독립을 위해 온몸과 생을 바친 호국정신을 잉태한 곳이기 때문에 의미가 더한다. 수당은 1855년(철종5) 동부도사(東部都事)를 역임한 이호식(李浩植)의 아들로 태어나 참판을 지냈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나자 격분하여 낙향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위정척사운동을 벌였으며, 1907년 홍주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민종식을 은신시켰다는 일진회(一進會)의 고발로 일본 경찰에 연행 중에 일본군에 의해 당시 온양의 평촌(현재의 충남 아산시)에서 아들 충구와 함께 피살되었던 것이다. 수당의 장남인 유재(唯齋) 이충구(李忠求,1874~1907) 선생은 부친을 도와 홍주의병에 참여했다가 거듭되는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는 부친을 군도로 내리치는 일본 헌병에 저항하다 결국 부친과 함께 순국했던 것이다.
 
 

▲ 수당고택 사랑채인 평원정의 편액.

■대청의 지붕 비 피할 수 있는 겹처마
수당고택(修堂古宅)이 있는 마을의 지세는 동편으로 봉수산(鳳首山)마루가 남으로 흐르다가 그 한 자락이 서편으로 빠지면서 작은 능선을 만들어 마을의 배산이 되었다. 마을 앞에는 작은 들이 횡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으며, 동편의 계곡에서 발원된 개천은 방산저수지에 머물러 있다가 마을 앞을 서쪽으로 흘러 달천과 합수되어 남으로 흘러간다. 마을길에서 이 고택으로 들어서면 왼편으로 사랑채가 있고 오른편으로는 안채가 있다. 보통 반가의 고택에서 보듯이 사랑채가 앞으로 나와 있고 안채는 그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당고택은 서쪽의 사랑채는 뒤쪽으로 들어가 있고 동쪽의 안채가 앞쪽으로 나와 있는 것이 특이하다. 20대에 청상이 된 부인의 주도로 지어진 가옥이라 부녀자의 권위를 말해주는 듯하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도 월방이라고 하여 아래쪽 문턱인 하인방과 위쪽의 방이 모두 둥글게 휘어져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 문도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부녀자의 편의를 고려한 형태라는 것이 이곳 문화재해설사의 설명이다.

통상 사랑채 앞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게 되는 일반적인 사대부 집과 달리 사랑채와 안채가 남쪽을 바라보며 ‘一’자로 늘어선 구조로, 서쪽의 사랑채가 동쪽의 안채보다 뒤편에 있다. ‘一’자형 팔작지붕 형태인 사랑채와 튼 ‘ㅁ’자형인 안채는 독립적인 담장을 두르며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서쪽의 별당건물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특히 이 고택의 안채 내부에는 매우 독특한 공간이 꾸며져 있다. 대청마루와 연이어진 안방 뒤쪽의 재실(齋室)이 바로 그 부분이다. 사당이 별도로 없는 이 고택에서는 안방 뒤쪽에 재실을 꾸며 대청마루와 연결해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수당고택 안채의 날개채는 안방과 건넌방이 대칭으로 되어 있다. 그 끝에 두 칸 크기의 부엌을 두고 뒤로는 온돌방을 꾸몄는데, 부엌문과 통풍을 위한 살창, 부엌 위의 다락 광창까지 모두가 똑같은 것도 특징적이다.

사랑채는 앞면 6칸과 옆면 2칸 규모로 툇마루가 있다. 안채는 중앙에 넓은 대청을 두고 동쪽으로는 안방과 웃방, 남쪽으로는 부엌이 달려있다. 대청의 서쪽에는 마루를 깐 공간을 마련하고 사당처럼 이용하였다. 대청의 앞면은 지붕 처마를 좀 더 앞으로 내어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처리한 것도 특이한 점이다. 사랑채에는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이 쓴 평원정(平遠亭) 편액이 걸려 있다. 별당건물인 평원정은 정면 6칸으로 펼쳐진 사랑채가 담도 없는 뜰을 향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원래부터 담이 없었다고 한다. 동쪽에 자리 잡은 안채에는 사랑채로 향하는 작은 문이 있다. 대문에서 안채가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내외의 벽이 있고 다시 중문을 들어서야 안채가 펼쳐진다. 중문 옆의 행랑채, 양옆의 부엌과 대청을 포함하여 ‘ㅁ’자 형태로 동쪽의 부엌과 중문 옆의 광 사이가 뒤뜰 쪽으로 트여있어서 뒷문이 바라다 보인다. 대청의 전면 지붕에는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겹처마가 달려있는데, 일반 사가에서는 금지되어 있던 형태라 하니 집을 지을 당시 비록 타계하였다 할지라도 북인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조부인 아계 이산해의 권세가 미쳤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다. “뒤뜰 구석에는 안채에서 기거하는 부녀자들이 사용했음직한 칙간과 지금은 수효가 많이 줄어들었을 장독대, 집을 지을 당시에는 없었다는 우물도 있다”는 것이 수당기념관 이문원 관장의 설명이다.
 
 

▲ 예산군 대술면의 수당 이남규 고택 전경.

■사랑채에 담장이 없다는 점 등 특이해
수당고택의 입구에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속이 파인 채, 반쯤만 살아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치 이 고택의 이정표처럼 서있다. 고택 길 안으로 들어서면 향나무가 고고한 선비의 거처를 지켜 주듯이 허리를 굽히고 줄지어 있는 사이로 사랑채와 안채가 눈에 들어온다. 1864년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른 이 고택은 여느 양반가와는 다른 특이한 점이 여럿 있다. 우선 전체적인 형태를 살펴보니 특이하게도 사랑채에 담장이 없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반가(班家)는 대개 사랑채 앞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이 고택은 사랑채가 안채보다 뒤쪽에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는 방향도 다르다. 또 높은 기단 위로 안채의 대문채가 당당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고, 왼쪽으로는 정원에 심어진 나무들 사이로 화계(花階)를 꾸몄다. 커다란 향나무는 허리를 굽히고 있어 마치 사랑채를 찾는 객들을 맞이하는 듯한데, 그 사이로 사랑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을 뒤편에 두고 자리한 이 집의 사랑채와 안채는 수평으로 나란히 지어진 것이 특징적이다. 사랑채는 ‘ㅡ’자형 팔작지붕 형태이고, 안채의 형태는 튼‘ㅁ’자형으로 독립적인 담장을 두르고 있다. 사랑채인 평원정(平遠亭)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크기이다. 막돌허튼층쌓기로 약 세벌대 정도의 높이로 만든 기단 위에 잘 다듬은 정사각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모를 죽인 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었다. 기단 앞쪽에는 계단을 두었고 계단을 통해 마루로 올라서도록 하였다.

사랑채 좌우측에는 넉살무늬 4분합문을 단 마루방을 앞면에 배치하였고, 대청마루는 4분합 띠살무늬 분합문을 두 칸의 대청에 각각 꾸몄다. 건넌방은 반 칸을 물려 앉히고, 아래에 머름대를 댄 덧문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왼쪽 끝에는 골방을 만들어 놓고, 뒤쪽에는 부엌이 꾸며져 있다. 사랑채 방문을 열면 사랑 뒷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에는 담장이 없으므로 가림 없이 사계절을 집 안에서 즐길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조선 정원건축의 묘미라 일컫는 차경(借景)인 것이다. 자연의 조화를 깨지 않으면서 최대한 자연에 동화되도록 배려하기 때문이다. 사랑채 후면에 꾸며진 사랑채 전담 부엌이다. 이 집의 또 하나의 실용적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사랑채 건물에는 아궁이 수준 이상의 부엌을 꾸미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고택(가옥)의 배치구조는 사랑채를 별도로 서측에 두고, 안채와 행랑채를 동측에 튼 ‘口’자 형태로 배치시킨 점이다. 일반적으로 반가에서 사랑채는 안채의 전면에 배치하여 인접시키는데, 이 고택은 서측에 횡으로 독립된 별채와 같이 배치한 흔치않은 경우이다. 따라서 이 고택에서는 사랑채가 별당의 기능까지 포함하고 있어 사랑채의 크기가 다른 곳에서보다 규모가 크다. 수당고택은 사랑채와 안채의 배치 및 평면 구성에서 이 지역 반가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 4대에 걸쳐 충절의 인물이 나온 이 집안의 긍지가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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