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이 하사한 정순왕후 생가, 300년 세월의 계암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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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이 하사한 정순왕후 생가, 300년 세월의 계암고택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0.1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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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7>
▲ 서산시 음암면의 계암고택은 3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명품고택으로 원형이 잘 간직돼 있다.

경주김씨 집성촌으로 충신과 지사와 효자를 여럿 배출한 마을
정순왕후 생가, 영조의 계비·왕비로 간택 될 때까지 살았던 곳
계암고택,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중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
정부가 지정한 명품고택 체험장, 위치·시설·인심 삼박자 갖춰


 

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한다리마을은 경주김씨 집성촌이다.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이 서흥부사로 재직할 때 임꺽정을 토벌하고 얻은 사패지를 근거로 약 500여 년 전 들어와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이곳은 경주김씨 집성촌으로 충신과 지사와 효자를 여럿 배출한 마을이다. 안주목사 김연(1494~?)이 입향 시조로 손자 적은 안기찰방을 하다 귀향했으며, 장남 홍익은 병자호란 시 왕위병을 이끌고 전투하다 광주 험천에서 전사했고, 말자 홍욱은 충청 황해감사를 했다. 이후 그의 증손자 홍경이 영의정, 말자 한신이 영조의 화순옹주와 국혼을 했으며, 그의 조카 되는 한구의 딸 정순왕후가 영조의 비가 되면서 다시 국혼을 맺는다.

정승만 해도 서른일곱명이 배출되는 등 많은 인재가 나왔고, 학자로 추사 김정희가 한다리 출신이며 독립애국지사도 3명이나 된다. 이렇듯 이곳의 경주김씨 가문은 많은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로 손꼽힌다. 김연의 7대손 김한구의 딸이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될 때까지 살았던 한다리마을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부촌으로 기와집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현재는 계암고택과 정순왕후 생가만이 남아 있다. 이 두 집은 담장을 이웃하며 오랜 세월을 함께하고 있다.

 

▲ 계암고택의 고려와당 박물관.

■영조 계비 정순왕후 생가 효종이 하사
정순왕후(1745~1805) 생가(기념물 68호)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태어나고 왕비로 간택 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이 고택은 한다리마을 야트막한 야산 아래에 동향(東向)을 하고 있는 ‘ㅁ자’형의 전통 목조기와집으로 조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출생한 곳으로 왕비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 씨가 죽자 영조 35년(1759)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고택은 조선 효종 때 문신으로 승지와 충청감사(忠淸監査)와 예조참의(禮曹參議),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김홍욱의 효성이 극진함을 알고 그의 부친인 김적(金積)에게 하사한 집으로 효종대(1649~1659)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 고택에서 김홍욱의 4대손인 김한구(金漢耉)의 맏딸로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출생하였다. 이곳 마을에서는 많은 애국지사도 배출되었으며, 300년 전에는 여류시인 오청취당이 이곳 한다리마을에서 182수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특히 정순왕후 생가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태어나고 왕비로 간택 될 때까지 살았던 곳이라 하니 정약용이 제일 먼저 유배 왔던 해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정순왕후가 1745년생이고 정약용이 1762년생이니 나이 차이는 정순왕후가 열일곱 살이 더 많았다. 정순왕후가 왕비로 간택된 1759년에는 정약용이 태어나기 3년 전의 일이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는 1777년 왕후나이 33세 왕비가 된 후 18년째 실권 없는 대비로 물러나고, 그로부터 13년 후인 1790년 정약용이 29세(정순왕후 46세) 나이로 이곳 해미로 유배를 오게 되니 두 사람의 악연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됐다. 이로부터 11년 후인 1801년 정조가 죽고(1800) 다시 실권을 잡게 된 정순왕후의 천주교 박해로 정약용은 다시는 벼슬길에 돌아 올수 없는 유배의 길로 떠난다. 1805년 실권을 집은 지 6년째 되던 해 정순왕후가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니 정약용과의 화해를 생전에 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의 관계는 끝이 난다.

이후 풀어 줄 사람이 없어진 유배살이는 18년이 계속되었으며 정약용은 돌아와서도 벼슬길은 영영 막히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현재 정순왕후 생가 고택은 16대 손으로 독립운동가인 백림 김용환 의사의 아들로 민선 재선 서산시장을 지낸 김기흥 씨가 지키고 있다. 이런 찬란한 역사 속에 많은 고택이 운집해 있었지만 현재는 계암고택(김기현가옥)과 정순왕후 생가만이 한가로이 한다리마을을 지키고 있다.

 

▲ 계암고택 안내판.

■500년 경주김씨 집성촌의 계암고택
계암고택(김기현 가옥, 국가 민속문화재 199호)은 솟을대문 옆으로 길게 돌담이 뻗었고, 담장 위로 날아갈 듯 사뿐히 치켜 올린 고택의 추녀가 길손을 맞이한다. 직선의 돌담이 건물의 유려한 지붕의 선과 중첩되면서 무질서하던 모습이 정돈된 느낌이다. 솟을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넉넉한 마당이 나오고, ‘一자’형 행랑채와 사랑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단아한 기와집은 고향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 행랑채와 사랑채 앞마당은 넓지 않아도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놀이터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행랑채에는 집을 수리할 때 나온 기와로 꾸민 고려와당박물관이 있다. 전시물은 적어도 호기심을 품고 전통문화에 접근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랑채는 차양을 둔 것이 돋보인다. 사랑채 한 칸 앞에 팔모기둥을 세우고,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을 얹었다. 앞면에는 겹처마를, 뒷면에는 홑처마를 달아 앞쪽을 길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계암고택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안채와 건물에 좌우로 각각 3칸씩의 건물을 달아내어 ‘ㄷ자’형의 평면을 이룬 안채 중앙 3칸은 넓은 대청을 두고 우측에 고방(庫房)과 안방부엌이 이어져 있다. 대청 좌측에 제실과 건넌방, 광 등이 있으며 광 옆으로 통하는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중문 칸이 나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 사랑채를 둘러 싼 담장은 자연석 외담장이며 대문은 평문으로 되어 있다. 화강석 1벌대 기단 위에 덤벙 초석을 놓고 그 위에 각기둥을 세웠으며 가구는 일고주오량 집으로 조량상부에 제형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와 함께 지붕의 하중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지붕은 홑처마이다. 이 고택은 정순왕후 생가와 연결되어 있으며 뒤에 얕은 산과 앞에 넓은 천(川)이 흐르고 있는 고택의 대문은 개수할 때 장소를 옮겨 낮게 한 것이 특징이다. 안채의 ‘ㅁ자’에 연결된 사랑채가 있으며 초당과 작은 사랑채 각각 3칸, 그리고 사랑채 앞에 행랑채 7칸이 있다. 그리고 사랑채와 행랑채방 앞에 작은 정원이 있다. 또한 차양채를 호화스럽게 건축하여 여름에는 시원하도록 건축한 것이 특징이다. 작은 사랑방과 큰 사랑방은 구들로 난방해서 황토 찜질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안채는 안방, 대청과 건넌방이 있으며 안방 부엌은 6칸으로 한옥식 부엌에 근대식 탁자를 배치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후원이 무척 아름답다.
 

▲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살았던 생가.

이렇듯 계암고택이 자리하고 있는 이 지역은 내포지역이므로 가야산을 중심으로 산들이 이불을 덮어 놓은 듯 낮게 드리워져 있다. 서울과 가까워 한양 양반들이 이 지역에 땅을 사 농토를 마련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평야마을에 자리 잡아 북동향을 하고 있는 기와집인 고택은, 지은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一자’형의 행랑채 안쪽으로 ‘ㅁ자’형의 안채가 있고 안채의 동쪽 옆에 사랑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행랑채는 7칸 규모로 왼쪽 끝에 바깥대문이 설치되어 있고, 부엌과 광,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향한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서 안마당의 오른쪽에 있다. 이는 대부분의 중·상류주택이 몸채를 안마당 건너편에 두는 것과는 달리, 일조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안채의 뒷뜰에는 3칸의 초가집이 있는데, 일종의 공부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택의 안방과 대청 앞면에는 개방된 툇마루를 달았다. 건넌방 아래쪽으로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과 아랫방을 들였는데, 옆에 있는 안대문간과 연결되어 있다. 안대문 오른쪽에는 사랑채의 사랑부엌을 배치하였다. 몸채를 안마당 건너편에 두는 대부분의 중·상류 주택과는 달리 해가 비추는 정도를 고려하여 안마당 오른쪽에 몸채를 둔 평면구성이 특이하다. 이 고택은 19세기 중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개축과 증축을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반 주택과는 달리 안채보다 간소한 구조로 꾸민 반면, 햇빛을 막아주는 지붕 시설을 돋보이게 한 점이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고택으로, 공간의 짜임새가 빈틈없이 구성되었으며, 호두나무나 감나무 등이 어우러져 소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현재 계암고택을 지키는 사람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충민공 김홍익의 12대손으로 김연의 후손인 김기현 씨 내외다. 이들 부부는 고택에서 한옥과 전통문화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정부가 지정한 명품고택 체험장을 운영하고 있다. 안주인 이효원 씨의 성심을 다하는 인심만큼이나 계암고택은 좋은 숙박 조건인 위치와 시설, 인심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고택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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