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1만4032명 희생자 한 서린 세계평화의 섬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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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1만4032명 희생자 한 서린 세계평화의 섬 제주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2.0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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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산평화인권공원(가칭) 어떻게 조성해야 할까? <9>
▲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제주 4·3평화공원. 오른쪽으로 기념관이 보인다.

2003년 10월, 대통령 첫 공식 사과 2014년 국가기념일 지정돼
제주 4·3사건, 1947년 3·1절 민간인 6명 경찰이 총살에서 출발
강경진압작전 중산간마을 95%이상 불타, 가옥 3만9285동 소각
4·3특별법, 4·3사건 갈등·반목의 역사청산 화해·상생의 정신

 

제주 4·3사건이 올해로 68주년을 맞았다. 2000년 1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고, 2003년 10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에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면서 4·3사건의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4년 1월 정부는 4월 3일을 국가추념일로 정했지만, 아직도 유족들은 4·3사건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는 지금도, 일부의 세력들에 의한 4·3사건 흔들기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고 전한다.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려 7년여의 시간동안 무고한 제주시민들이 희생을 당했던 것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주민들이 희생됐고, 그 중에서 90%가 일반인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아름다운 제주의 오름과 숲은 당시 그들에겐 생존을 위해 몸을 숨기기 위한 장소였고, 여성들은 극단적 상황에서 성적 유린까지 당했다. 부모와 형제를 잃은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고, 생존에 몸부림 쳤지만 연좌제에 묶여 장래마저 막힌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마침내 지난 2003년 10월 31일, 대통령의 첫 공식 사과가 있었고, 그로부터 11년 후인 2014년 고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마침내 침묵과 금기의 역사를 깨고 국가 기념일로 지정됐다.
 

▲ 기념관 전경.

■희생자 1만4032명, 유족 3만1255명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된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제주 4·3민중항쟁은 1947년 3·1절 기념집회에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다치게 되고, 이를 항의하는 사람들을 향해 경찰이 총기를 발포해 민간인 6명이 사망하는 사건에서 출발했다. 이렇게 시작된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 경찰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여명이 구금됐다.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무장봉기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서청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해 4월 말 무장대 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제9연대장은 교체됐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 5·10선거를 추진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으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결국 5·10선거 이후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됐으며,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사람을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는데, 11월 중순께부터 이듬 해 2월까지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방화됐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렀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됐다. 그러나 6·25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란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됐다. 또 전국의 형무소에 수감됐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됐다.
 

▲ 민간인 희생자 1만4032명의 이름 등의 원혼을 담아 세운 비석.

■매년 4월 3일 추념광장에서 위령제 지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돼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4·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만5000∼3만 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만9285동이 소각되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희생자로 1만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만1255명이 결정됐다.

제주4·3평화재단 이문교 이사장은 “1999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제주방문에서 위령공원조성 사업비 지원을 약속한 이래, 2000년 1월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평화공원조성사업이 이루어 졌다”며 “2001년 6월 기본 계획안이 확정되고 2002년 부지 매입 및 실시 설계를 완료한 뒤 2003년 4월 3일 기공식을 가졌다. 제주 4·3 평화공원은 39만 6743㎥(12만평)의 넓이에 조성됐으며, 크게 3개의 영역으로 구성돼 있다. 위령제단·추념 광장·위령탑·상징 조형물 등이 조성되어 있는 위령·추념 공간과 4·3 사료관이 조성되고 있는 역사 재현 공간, 그리고 4·3문화관 등이 있다. 주요시설은 위령제단과 위령탑, 추념광장, 위패 봉안실이 있다. 매년 4월 3일 추념광장에서 위령제를 지낸다. 또한 2005년 11월에는 진입로, 연못, 관리실, 조경, 전기 등 기반시설이 완료됐다.

2005년 12월에 4·3사료관 건립에 착수하여 연면적 1만1455㎥의 지하 2층, 지상 3층의 사료관이 2007년 12월 완공됐으며, 독일 평화와 통일의 상징물인 ‘베를린 장벽’이 제주4·3평화공원에 설치돼 있다”고 설명했다. 제주4·3평화공원은 4·3사건 발발 이후 50여 년간 해원되지 못한 4·3사건 희생자의 넋을 위령하고 4·3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희생자의 명예 회복 및 평화와 인권 교육의 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됐다는 설명이다. 제주4·3사건의 역사를 기억하고 재현하여 4·3정신과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상징적인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제주4·3사건의 아픔을 딛고 평화의 인권의 가치를 구현하는 공간으로 거듭나자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주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됐으며, 제주도는 지난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 제주4·3평화공원이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의 대표적 명소로 부상하고 있는 이유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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