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하게 중부지방의 특징 잘 간직한 논산 윤황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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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하게 중부지방의 특징 잘 간직한 논산 윤황 고택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2.0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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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13>
▲ 논산의 윤황고택 안채와 오른쪽으로 보이는 사당채 전경.

한옥은 오랜 세월을 견디고 남아 있는 우리의 문화다. 하지만 실내에 욕실, 화장실 등을 갖춘 도시형 주거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전통 한옥은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옥에서는 하루가 오롯이 지난다. 아침 해의 눈부심, 한낮의 쨍쨍함, 저녁의 노을, 밤의 달빛이 모두 머문다. 자연과 소통하는 호흡마저 생생하다. 비가 올 때는 빗소리를 벗 삼아 한 잔 술을 기울이고 싶어진다. 대나무를 간질이는 바람의 장난기도 손에 닿을 듯 느껴진다. 이 포근함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혼자인데도 혼자가 아닌 이유다. “고색창연한 한옥에서의 하룻밤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대청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며 본 달빛과 소나무는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느림의 미학을 즐기려는 도시인들이 늘면서 한옥이 뜨고 있는 이유다. 바쁜 일상을 벗어나 호젓하게 여유를 누리며 힐링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한옥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영의정 지낸 윤황의 고색창연한 고택
충남 논산은 조선의 500년을 이어 온 유학의 양대산맥 중 하나로 기호유학의 본산이다. 논산의 이곳저곳에는 당대의 유학자들의 자취를 쉽게 만날 수 있는데, 그 중 조선 후기의 학자요 정치가에 사상가이며 서인, 소론의 영수인 백의정승 명재(明齋) 윤증의 할아버지로 선조 때 태어나 광해군 시대를 지나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얻은 인조17년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며 사후에 영의정까지 추증된 윤황의 고색창연한 고택이 있다.

이 고택이 처음에 지어진 년도는 정확하게 전해지지가 않으나, 윤황(1572∼1639)의 6대손으로 함안 현감을 지낸 윤정진이 1730년경 조선조 영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는 고택이라 전해진다. 이 고택은 ‘一자’형의 사랑채와 ‘ㄱ자’형의 안채로 구성돼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튼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담을 쌓아 안채와 구분을 하고 있으며, 좌측으로는 ‘ㄱ자’형의 안채가 자리하고, 우측으로는 ‘|자’형의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우측에는 높게 앉은 사당채가 자리하고 있다. 윤황의 고택은 화려하지 않으며, 간결하게 지은 옛 전통 가옥으로 중부지방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윤황은 조선조 선조 5년인 1572년에 태어나서, 인조 17년인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자는 덕휘, 호는 팔송으로, 선조 30년인 1597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인조 때에는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내기도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1637년 김상헌, 정온 등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는 죄로 붙잡혀 갈 때, 윤황은 자신이 대신 잡혀 가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됐다. 남을 이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겠다고 자처를 할 수 있는 윤황의 고택 앞으로는 ‘一자’형의 사랑채가 6칸으로 구성돼 있다. 가운데 다섯 칸이 있고, 좌우측에는 반 칸의 높임마루를 한 방이 있는데, 사랑채를 바라보며 좌측은 앞으로 돌출이 된 작은 공간이고, 우측은 측면으로 툇마루를 달아낸 누정 방으로 꾸몄다. 중앙 좌측의 두 칸은 온돌방으로 했으며, 이어 두 칸의 대청을 두었다. 대청은 두 칸 모두 네 짝 문을 달아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배수로를 냈는데, 연도가 그 배수로를 지나 낮은 굴뚝과 연결이 된다. 굴뚝을 이처럼 낮게 만드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낮은 굴뚝을 바라보면서 늘 그 굴뚝처럼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위하라는 뜻이다. 종가집들의 굴뚝이 하나 같이 낮은 이유가 바로 그렇다. ‘집안에 모든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도 겸손하라는 것’을 일러주는 교훈이다.

▲ 윤황의 학문과 덕행, 유학교육 위해 세운 노강서원.



또 하나의 이유는 방역이다. 예전에는 대개 한옥에서 소나무나 참나무 등을 이용해 불을 지핀다. 나무를 넣기 전에는 낙엽 등을 이용해서 불씨를 만드는데, 그때는 연기가 많이 나게 된다. 그 연기들이 낮은 굴뚝에서 뿜어져 나와, 집안 곳곳에 병충해를 잡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한옥에는 그 작은 것 하나하나도 다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황 고택의 안채는 화려하지 않다. 분칠을 하지 않은 맨 얼굴처럼 정숙하다. ‘ㄱ자’형으로 꺾인 안채는 좌측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두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와 같이 안채의 대청에도 창호를 달았다. 그리고 우측 맨 끝 방은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한데 아궁이를 내었다. 이렇게 높임마루를 놓았을 경우 그 측면에는 낮은 툇마루를 놓기도 하는데, 윤황 선생의 고택은 그 흔한 툇마루마저 없다. 그저 치장을 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억제를 한 고택이다. 뒤편으로 돌아가며 보수를 하면서 새로 쌓은 듯한 축대가 있다. 그 축재 한편에는 장독대가 놓여있는데, 일반적인 종가의 장독대와는 다르다. 그저 평범한 민초의 장독대와 다를 바가 없다.황 고택의 사당채는 양편에서 오를 수가 있다. 사랑채 뒤에서 일각문을 통해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제의를 지낼 때 종친들이 사랑채에서 바로 오를 수 있도록 낸 길일 것이다. 또 하나의 길은 안채 뒤편 계단을 통해서 사당채로 오르는 길이다. 역시 담장에 일각문을 내었다. 이 문은 안채에 있는 부녀자들이 음식을 나를 때 동선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노강서원 윤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
충남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52에 충남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윤황(1572∼1639)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윤황 고택은 처음으로 건축된 시기와 장소를 알 수 없다. 지금의 건물은 윤황 선생의 6대손인 윤정진(尹定鎭)이 1730년대인 조선 영조 때 이곳으로 이축한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윤황의 종가(宗家)로 대대로 내려오고 있다. 1985년 12월 31일 충청남도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됐다. 윤황 고택의 건물은 모두 4동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사당이 있고, 목재와 석재로 지어졌다. 이 고택은 ‘一자’형의 사랑채와 ‘ㄱ자’형의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구조는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지붕은 모두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간결하게 지은 옛 전통 가옥으로 중부지방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ㄱ’자형의 안채와 그 옆에 아래채가 있다. 별채로는 사당과 일자형 사랑채가 있다. 안채는 민도리집이며,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을 겸해 있다. 이 고택의 가운데 3칸은 대청을 겸한 통간 우물마루를 두었고, 오른쪽 툇간에는 누마루를 두었다. 누마루 뒤에는 방이 있다. 대청 옆에 2칸의 긴 방과 부엌이 연결되어 있다. 사당은 중앙에 2칸의 대청이 있고, 그 양쪽에 방을 배치하였다. 대청의 마루문은 4짝씩이며, 방문은 2짝으로 되어 있다. 고택의 구성은 안채, 사랑채, 광채 등 3채의 살림집과 사당 1채로 돼 있다.

윤황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노곡(魯谷),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전적· 감찰·봉상시정을 지내다가 군기감정 때 탄핵을 받아 노성에 은거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재등용되어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였다. 부제학 전식(全湜:1563∼1642)의 탄핵을 받아 영동군에 유배되었다가, 병이 들자 풀려나왔으나 악화되어 세상을 떴다. 이후 영의정에 추증됐다.

▲ 윤황고택 사랑채.



한편 논산에는 서원이 많다. 조선 헌종 13년(1672년)에 건립된 노강서원은 윤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해 세운 서원이다. 강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로 대청과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노강서원은 1675년에 김수항(金壽恒) 등의 발의로 윤황(尹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건립됐다. 윤황(尹煌)을 주벽으로 윤선거(尹宣擧)를 봉안했으며, 1682년에 사액을 받고 윤문거(尹文擧)를, 1732년에 윤증(尹拯)을 추향하였다. 1717년 정쟁으로 인해 윤선거, 윤증 부자의 관직이 삭탈되면서 사액 현판까지 철거됐다가 1722년(경종 2) 관직의 회복과 더불어 현판이 복액됐으며, 1781년에 중수했다. 노강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때 철폐되지 않는 47개 서원 중 하나로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강당도 서원 창건 당시 건립돼 그 모습을 유지해오고 있다. 노강서원은 돈암서원과 함께 호서지역의 대표 서원이며, 소론계 서원의 중심으로 정치, 사상, 문화적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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