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98돌, 그때 홍성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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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98돌, 그때 홍성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7.03.0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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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1>

3·1운동, 일제 식민통치에 민족의 거족적인 저항 행동으로 옮겨
홍성장터에서 3월 7일 ‘대한독립만세’ 부르며 시위 시작 촉발돼
광천에서 3~5월 사이 10여 차례 3000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해
장곡면민 500여명 참여 홍성서 가장 치열한 만세운동사건 기록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후 식민지 경영의 통치 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고,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한민족은 무단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했다. 또한 회사령의 실시로 민족 자본가의 발전을 가로막고, 1910년부터 1918년 사이에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으로 불법적인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가 인정됐고, 지주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이러한 거족적인 민족해방 의지를 바탕으로 1919년에는 손병희·최린 등 천도교계, 이승훈 등 기독교계, 한용운 등 불교계가 독립선언을 계획해 독립선언서, 파리강화회의 등에 보내는 독립청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독립의견서 등이 작성됐고, 2월 27일에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돼 종교 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됐다. 이후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독립선언이 이뤄지면서,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됐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1910년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우리 민족의 불만이 폭발하여 거족적인 저항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 바로 1919년(기미년)의 3·1운동이었다. 3·1운동은 10년에 걸친 식민통치를 무단통치라는 공포속에서 강행하고,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착취정책과 야만적인 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났던 것이다.

■충남지역 3·1운동 예산에서 시작돼

충남지역에서의 3·1운동은 3월 3일 예산의 읍내리에 사는 윤칠영(尹七榮) 등 다섯 명이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날 밤 11시경 가까운 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외침으로써 시위가 시작돼 4월 12일까지 계속됐다. 특히 홍성에서는 홍성장터에서 3월 7일 수많은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면서 촉발됐다. 이날 시위 군중에는 백야 김좌진(金左鎭) 장군의 제종제로서 나중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적에게 피살된 김종진(金宗鎭)도 합류했다. 이후 홍성의 동북부 4개면인 홍북·금마·홍동·구항면의 24개 촌락에서도 독립만세의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일제수비대가 동서에서 집중 발포하여 10여명이 순국하고 홍북의 박군상은 고막이 터지는 부상을 입는 등 다수의 민중이 부상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기도 했다.

한편 광천에서는 3월 8일  광천시장과 옹암리에서 대한독립을 주장하는 벽보가 나붙었으며, 3월 18일에는 독립선언서의 요지를 담은 50여장의 문서가 광천읍과 옹암리 등의 각호에 배부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한 재판기록에는 ‘이명종은 3월 8일 박원식과 함께 대한독림을 주장하는 벽보를 양지로 만들어 광천시장과 옹암리 2개소에 붙였다. 또 이명종과 성배호는 주민 수명과 함께 3월 18일 오인섭의 집에서 탄산지로 선언서의 요지를 50여매 복사해 이날 밤 광천읍과 옹암리 각호에 배부하였다. 이밖에 최응모와 오인섭 두 사람은 3월 16일경 이명종으로부터 한국독립운동의 권유를 받고 이에 찬동해 대한독립을 주장하는 뜻의 선언서를 다수 등사하기로 하고 이명종과 성배호는 이를 배포하기로 합의하여, 최응모와 오인섭은 다른 몇사람과 함께 18일 오인섭의 집에서 탄산지로 선언서 50매를 복사하고 이명종과 성배호는 이를 읍내 각호에 배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차로 3월 21일 광천장에서는 수백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했다. 광천에서는 3~5월 사이에 총 10여회에 3000여명이 만세운동에 동원돼 29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했으며, 65명이 피검됐다. 두 번이나 일본군이 출동하기도 했을 정도로 만세운동이 치열하게 전게됐던 곳이다.

■각 면에서도 만세운동 부르며 절규

홍동의 신기리 이제경·조우식(趙禹植) 등은 3월 5일 밤 동리 뒷동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약속하고 그날 밤 봉화를 올리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순간 수백여발의 탄환이 날아와 뒷동산은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이희도(李羲圖)·한명교(韓命敎) 등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이석만(李錫滿)·안중호(安重浩) 두 사람은 관통상을 당했으나 오랜 치료 끝에 생명은 구했다. 이후 일본경찰은 신기리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그중 13명을 구속하고 태형을 가했다. 한편 원천리의 황윤성(黃允性)은 평소 배일사상이 강해 인근을 돌아다니면서 세천부락은 청광산에서, 중원부락은 석삼봉에서, 월현부락은 종현봉에서 4월 8일 밤 거사하기로 하고 만세를 부른 다음 주재소를 습격하자 일본경찰은 다음날 황윤성을 체포했다. 체포된 황윤성은 모진 고문에도 관련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버티다가 심한 고문에 못 견뎌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은하에서는 3월 21일 대천리에서 다수의 군중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9일 밤장곡리에서도 망르주민 다수가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와 관련하여 전명규(田明圭) 등 8명이 체포돼 홍성경찰서에서 즉결처분을 받았다.

금마에서는 4월 1일 밤 가산리 연극공연장에서 관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재판기록에는 ‘민영갑은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이재만과 공모하여 4월 1일 금마면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공연이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여 김재홍·최중삼·조재학·조한원(趙漢元)의 찬동을 받아 이날 밤 8시경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주민들 20~30여명이 이에 호응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조한원의 아들 증언에 의하면 이날은 경찰에 의해 해산만 당하고 다음날 홍성시장에 나가 군중속에 뛰어들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으나 적의 추격을 받고 피신하여 이틀 후에 붙잡혀 홍성경찰서에 감금됐는데 다수의 사람들이 태형을 받고 금마면과 홍성읍 사람들 18명이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 증언으로 볼 때 홍성시장에서의 의거는 4월 2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곡에서는 화계리의 윤익중(尹益重)·형중(衡重)·낙중(樂重) 삼형제는 4월 4일 밤 화계, 광성, 신풍 등 세 동리 사람들을 이끌고 봉화를 올리며 만세를 불렀고, 4월 6일에는 면소재지인 도산리에 모여 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이어 4월 7일 밤 8시경에는 면민 약 500여명 전체를 불러 도산리 소재 면사무소에 이르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문기둥과 유리창 등을 파괴했다. 이날 참가한 화계리 주민들의 경우는 먼저 동네의 앞산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했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면민들은 8일 밤 11시경 약 60여명이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는데, 출동한 경찰과 보병이 이를 막아 곤봉 등으로 대항하며 면사무소의 유리창과 굴뚝, 문기둥 등을 파괴해 군중에게 힘을 주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때 일본경찰의 발포로 11명이 체포되고 2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중에서 가송리의 김동정(金東鼎)은 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했고, 윤태병(尹泰炳)·김상호(金商浩)·최석환(崔錫煥) 등은 체포되어 10여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석방됐다. 장곡사건은 홍성에서 가장 치열한 만세운동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구항에서는 4월 7일 황곡리 주민들이 월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세워놓고 횃불을 올리며 모두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이날의 주동인물은 이길성(李吉性)·황문수(黃文秀)·이희창·이동규·이유홍(李有弘) 등 다섯 사람은 백월산에 올라가 홍성시내를 향해 만세를 불렀다. 이백영(李伯榮)·황통명(黃通明)·하유숙(河有淑)·전남규(田南珪)·이희보(李熙輔) 등이 참가했다. 다음날 황곡리는 일경의 범인수색으로 소란이 일었고, 이길성·황문수·이동규·이유홍 등 네 사람은 체포돼 갖은 악형을 받았는데, 이동규·이유홍 두 사람은 구속 20여일에 태형을 받고 출감했고, 이길성은 13개월, 황문수는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날 거사에 대한 재판기록에는 ‘이길성은 전국에서 일어나는 독립운동에 호응하여 자택에서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희종이 깃발을 하나 만들어 4월 7일 밤 마을주민들을 선동하여 이 깃발과 장작을 가지고 월산 위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며 깃발을 세워 놓고 마을 주민 수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고도면(지금의 갈산면)에서는 3월 3일 김복진(金宓鎭)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온 것이 동기가 돼 면소재지인 상촌리에 있는 갈산보통학교 학생 105명은 3월 5일 조회시간을 이용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고, 김복진·유철규(劉哲圭)·김준규(金駿圭)·이동우(李東雨) 등이 주동이 돼 비밀리에 추진하고 이날 조회가 끝나자 유철규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가두로 진출하려 했으나 교원들의 제지로 교정에서 시위를 했다. 이후 경찰은 김복진·유철규·김준규·이동우 등 50여명의 학생을 3일간 구속했으며, 유철규는 주동자란 혐의로 10일간 구속을 당하는 등 모진 고문을 당해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런 생활을 했다. 이후 4월 8일 오전 9시에 또 갈산보통학교 학생 6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절규했다고 한다. 이처럼 3·1운동은 200만 여명이 참여해 7500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5만 여명이 투옥되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이 운동은 일차적으로는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인해 독립쟁취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후 민족해방운동에 귀중한 교훈을 남기게 됐다.한관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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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철 (태송) 2017-09-27 12:25:46
신문 잘보았읍니다. 그런데 제가알고있는 기록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읍니다.저는 홍양사 최초발행된 원본과 정부기록문서보존소에서 발행한 재판기록문을 소장하고 있읍니다.광천 선대로 살았고 학무위원을 2번역임하시고 덕명학교를 설립하신 일농선생의 기록은 한줄도없군요? 독립선언문은 한문이기에 한글로 번역해서 제자인 오인섭과 박원석에게주어 인쇄하여 배포되었다는 기록과 광천장날 전교생을 데리고나가 선창에서 만세를 주도하셨다는 내용이 기록물에 있읍니다.
역사기록을 취재하실때는 진실만을 기록해주시기 바람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