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시절이 다 넘어가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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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절이 다 넘어가네 그려…”
  • 취재=김옥선/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4.0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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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1>

어려운데 시집와 도드락도드락 일해놔 이제껏 살어
황해도서 피난민들이 많이 와서 사람 겁나 많았어 
우리 둘째 아들 넘 살린다고 하다 부명의로 죽었어


 

임순애 1924년 은하면에서 태어나 17살에 서부면 판교리 수룡동으로 시집왔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를 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신도 않구 고모가 여기 데리고 왔어. 우리 어매가 나 10살에 죽고 고모네서 컸어. 시어머니 자리도 고모네 오고 가고 했구. 옛날에 시어머니 어려서 시동상 하난데 시동상 죽고 나서 동서를 얻어 들이면 한 달 두 달 있다 나가고, 그러면 민며느리 얻어다 키워가지고 다 갖춰서 성인 시켜놨는디 다른 동네서 꾀어갔구 딴데로 시집 갈뿌구. 우리 시어머니가 자기 옷 입혀가며 사람하나 보구서 의지한다고 오고가고 그걸 고모가 보고서 그래 시집왔어. 중신애비도 여기는 별루 읎어. 시작은아버지가 고모네 다녀서 조카며느리 삼으면 괜찮다고 해서 나도 어려운데 시집와서 도드락도드락 일해놔서 이제껏 살어. 

리 시어매는 치마 둘러쓰니가 여자지 남자처럼 성질이 겁나게 무섭고 그랬어. 옛날에 길쌈하고 그랐는디 나는 고모네서 커서 그란걸 해봤깐? 바느질 같은 건 잘했어. 내가 우리 고모가 술 팔고 뭣하고 해도 여름이나 겨울이면 옷 다 꼬매서 입고 다녔어. 옛날에 자방같은 게 있었나? 죄 손바느질이지. 내가 우리 고모 본 봐서 바느질은 하는디 명주길쌈, 모시길쌈 이걸 할 줄 알아야지. 그 때만 해도 이빨이 좋았응께 무릎 이렇게 꿇고 앉아 한참 시어매 봬가지고 베를 짰네. 베 짜서 광에 쪄서 그렇게 했지. 우리 시어매가 괄괄해서 부엌에 가서 소금 넣고 물 해 놓고 끄스라고 하면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한하면 부엌으로 쫓아 들어와 난리가 나 난리가. 그렇게 무섭게 살았어도 앙탈 한 번 않고 그냥 죽으라면 죽으라는 시늉하고 그라고 살았어.

 동네가 예전에 배도 많이 부렸어. 황해도 이런데서 피난민들이 많이 와 가지구 사람 겁나 많았어. 저기 국화밭 있는데까지 물이 들어왔었어. 여기 배 닿고 천북 가는데 거기 막아놔서이 오염돼갔고 괴기가 죽어. 여기가 김 잘 매고 굴, 바지락 있고 고루고루 있었어. 여기 안 막았을 때는 우리들이 김 뜨는 기계를 2대 놔 갔구 고개 너머 오면 헌 집 거기서 여자 남자 10명씩 해 갔구 김 다 떴어, 우리가. 딴 사람이 떠 달라고 하면 떠 주고 그리 하느라고 뒤어질 뻔했네. 밤이나 낮이나 밥 해줘야지, 찬거리 해줘야지, 우리 며느리가 욕 봤지. 밥 해주고 그러니 얼마나 어렵겄나? 글고 바다를 이렇게 막으면 되겄나? 안 되지. 그래갔고 시방 여기가 썩어갔구 오염되서 괴기가 읎어. 여가 없는 거 읎었어. 여기가 보기가 이래두 이 모양 됐어.

여기 막으면서 망했당께. 보상도 한꺼번에 말하자면 어린애 자지 떼주듯 조금씩 조금씩 해주니 그거 갔다 뭐한댜. 톡 털어버리고 농사도 읎어. 논농사도 최서방네 두 집하고 김씨네 요 아래 빨간 집하구 시 집 논 져. 우리도 옛날에 우리 영감 철선 막 지어가지구 갈치, 조기 막 들이고 할 적에 동네서 2등 갔었어. 우리가 말하자면 속말로 세금 많이 낸다 했어. 그렁께 우리 시아버지가 “얘야. 그런 말 마라. 세금 많이 물고 사는 집이 밥 먹고 산단다” 그러는데 그 말이 꼭 맞어. 우리가 잡던 갯바닥 다 넘헌테 뺏겨가지구 우리 잡는 터가 좁은디 잡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딴 데 못 가고 딴데 가면 붙잡힌데 어떡한댜. 그러잖은가. 우리가 딴 나라에 갈 수 있다나? 그 사람들은 경비선이 있응께 몰래 와서 잡는디 우리덜은 조기 같은 거 잡으면 다 뺏겼어.

들키지 않으면 괜찮구 들키면 경비선한테 다 뺏기구 사람도 붙잽혀가고 그랐어. 전장 전장해도 모르는 사람들 몰라서 그렇지 무서분거여. 쭈구미, 고등어 이런거 잡아먹은데가 다 막아놔 오염돼갔고 괴기가 새끼를 깔 수가 읎어. 짐승이란 것은 다 물이 깨깟하고 돌팍 있는데 가서 알 다 까놓고 품겨서 키워갔고 나온다나자. 근디 오염되서 뻘땅이 썩어서  괴기가 와서 새끼까고 살겄나? 우리 아들이 지금도 배 부리고 그려. 지금은 하나만 하지. 옛날에 뱃동사들 타관서 돈 많이 번다구 오면 괴기 많이 잡으면 좋을텐디 괴기 안 나오면 기름값, 얼음값 다 빼고 나면 되나? 안 되지. 벌구 안 벌구 뱃동사들 돈 줘야혀. 그래야 나가지 안 그러면 버티고 안 나가. 그런께 괴기 흔할 때나 그런 짓 했지, 지금은 안 나니께 소용읎어. 어른들 그전에 말씀하는디 조개 바지락 들어올라믄 배 밑구녕서 가만히 들으면 소리가 막 솨아아~하면서 물을 쏴 가지구서 물결대로 들어오면서 그것들도 몰려다닌대.

조기 같은 거 잡을라믄 선장들은 안 자고 배 밑에 가서 쥐소리도 없이 기대고 있으믄 깨구락지가 왁왁하는 소리가 때잽이로 운대. 그라믄 선장들이 뱃동사들 깨가지고 여기가 조기 있응께 그물 치자고. 그라믄 조금 있다가 팔뚝같은 조기가 알이 툭툭 배갔고 한 배씩 잡아갔고 왔어. 그라믄 그 배가 막 그냥 기를 달달달 물에서 끌고 왔어. 아무개 배 들어온다고 해서 보믄 저 배는 떳구나, 잘된 배는 떳다구 했어. 그런 시절이 다 넘어가구 그라네.
 

시아버지 한상원 씨와 시어머니 오옥애 씨.

이서 지성을 얼매나 들인다고 그러나. 면사로 조기그물, 갈치그물 사람들 집집마다 뜰 줄 아는 사람들 한 폭에 얼마씩 주고 그물 하나에 8폭을 붙여, 치마폭 마냥 붙여. 끄트머리 가서는 괴기 들어가서 갇혀 있는디 거긴 겁나게 곱게 떠야 혀. 또 그 눔을 감침질 혀. 끄트머리에 대갔고. 처음 나갈 때는 되아지 잡았어. 그물 짜고 닻 짜고, 줄 감고. 세 가지 다 배에 싣고 떡방아 손으로 빠수고 탕국 끓이고 죽은 조상들 바쳐야 혀. 당제 지내는 그 밑에 시암 가서 동지섣달이라도 물에 성에 났으면 돌팍으로 깨치고 그 물 떠서 이렇게 세수하고 거기서 뫼를 숟가락으로 뭉쳐서 물에다 던지면 팡~팡~ 들어가. 집에서 뭐 부정하던지 잘못했으면 밥이 이렇게 까져서 하얗게 까부라져. 그러면 다시 해야 혀. 그러니 집에서 얼마나 저기 했겄나. 지금은 옛날 비하면 천지조화도 저기지. 시방은 암만 잘한다고 해도 그렇게 못 따라가지.

감이 바람 피니께 속 썩었제, 쪼끔. 항구로만 데니고 남자들이 외지 가서 가만 있겄나? 그런데 가서 살림하다 마누라 얻어갔고 아들도 하나 놨어. 오엽이나 했으면 하는디 그 아들이 또 그렇게 똑똑혀. 첩의 아들이 똑똑허더니 그 말이 옳대. 걔도 지 어미가 이북서 왔어. 외삼촌, 이모하고 피난 왔다가 강원도가 살았댜. 인천 배들 많고 하니 조기 같은 거 떼 가지구 팔러다녔다네. 나도 우리 둘째 아들 잃었어. 8월에 철선 짓고 뺑기칠하고 9월에 작업 나갔는디 그 날 바람이 얼매나 부는지 선장이 바람 불고 들어가야 한다고 항께 바람소리 물소리로 잘 안 들리드랴. 그러다 딴 사람이 로라에 발이 갬겨서 다리 잘라지게 생겼응께 우리 아들이 뛰어 들어가서 기계를 끈다는 게 우리 아들도 로라에 갬겨갔고. 넘 살린다고 하다 부명의로 죽었어. 그래갔고 우리 영감이 울적해갔고 치매 마냥 앓다가 오래는 않고 석 달 어디 출입 못허구 누운지 열흘만에 죽었어. 덕산으로 목욕을 꼭 사흘만에 한번 씩 대니고 그래쌓는데 그래도 복 있게 죽었어.

리 둘째 아들 서른 살 먹었으까. 우리 큰 아들이 그러대. “아부지, 나도 우리 동상 불쌍해서 내가 어려도 처랑 아버지 어머니 살아계실 동안 내가 제사 할 테니 걱정 말아유.” 제삿날 여자들이 빨래하고 목욕하고 제사 참여한다더니 우리 아들이 꼭 머리 감고 제사 지내. 우리 아들이 백점이여. 우리 큰 며느리가 다 제사 지어준당께. 시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다누.

평생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내주고 땅에 뿌리를 단단히 박은 당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나무입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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