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정 물로 짓는 농사 오랜 가뭄에 지하수도 바닥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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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정 물로 짓는 농사 오랜 가뭄에 지하수도 바닥나
  • 취재=허성수/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8.2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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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있는 농촌마을 사람들<21>

농촌마을 희망스토리-홍동면 원천리 세천
지방도로인 광금남로 63번길에서 바라본 세천마을 모습. 산이 포근하게 감싸주는 듯한 형세로 피난하기 좋아 ‘피난골’로도 불린다.

홍동면에서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한 원천리 세천마을은 구항면과 광천읍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뒤 야트막한 산이 감싸 안고 있는 형세로 왕복 2차로 지방도인 광금남로 63번길에서 보면 아늑한 모습을 연출한다. 지금은 53가구에 약 1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거의 농업에 종사한다. 축산이나 특수작물은 거의 하는 사람이 없고 주민들 대부분 논농사와 자급자족을 위한 밭농사를 한다. 소득을 위한 특작물로는 취나물을 꼽을 수 있다.

■ 조선시대 역말이었던 세천역
세천은 조선시대 금장도에 딸린 세천역이 있던 마을이었기 때문에 ‘역말’이라고도 부른다. 원천리 세천과 함께 같은 법정리에 속하는 중원은 조선시대에 중요한 역로(驛路)였다. 보령에서 홍주로 가는 길목으로 세천역이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홍주군 번천면의 치소가 위치한 요충지였다. 이 일대에 주막께, 빗독거리, 갈마지고개, 개월고개, 퉁퉁골고개 등 교통과 관련한 지명이 많아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길을 지나던 암행어사가 세천마을에 머물다 가기도 했는데 그 집이 마을 안 수령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는 오른쪽 언덕에 있는 집으로 알려져 있다.

세천은 조선 후기 외지인들이 머물다 가기도 했고 국가시설로 파견된 관리가 관할하며 업무를 보는 관노가 거주했다. 산줄기에 둘러싸인 골짜기 안쪽 지역이어서 주민들은 피난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주 김 씨가 1800년대에 천주교의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온 것은 피난골이라는 마을의 특성 때문이었다. 원래 예산군 신암면에서 살았던 경주 김 씨 집안이 김대건 신부가 순교를 당하자 세천으로 들어왔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특정 성 씨의 집성촌이라고 할 수는 없고 ‘피난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성 씨들이 들어와 어우러진 공동체가 됐다.

■ 이정갑 이장, 관정 물 거의 메말라

이정갑 이장

지난 16일 세천마을 주민들이 아침부터 마을 진입로 제초작업을 한 후 마을회관에 모였다. 그 날도 태양은 좀처럼 식을 줄 모른 채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활활 타올랐다. 한 달 이상 지속되는 가뭄으로 타 들어가는 농작물을 바라보며 세천 주민들도 탄식을 했다. 가까운 곳에 저수지가 없어 관정의 물로 논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밭농사를 아예 포기했다며 하늘을 원망했다. 그러나 관정도 한 달 이상 계속 물을 퍼 올려 쓰다 보니 샘의 근원이 마르고 있다며 군에 더 깊은 관정을 파달라고 요구했다. “오랜 가뭄으로 물이 다 말랐습니다. 옛날에 파놓은 소형 관정은 가뭄이 심각한 상황에서 물이 잘 안 나와요.”

세천마을 이정갑 이장은 현재 관정의 깊이가 50자(15m)밖에 안돼 더 깊고 더 넓게 파야 한 달 이상 지속되는 가뭄에 퍼 올릴 수 있는 물이 있다고 말했다. 지금 주민들이 말하는 관정의 상태는 모터를 돌리면 1~5분 정도 물이 나오다가 만다. 그래서 들판에 군데군데 대형 관정을 파야 지속되는 가뭄을 해결할 물 공급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물론 주민들이 해결하기에는 적잖게 돈이 드는 일이어서 군에 요구를 했다.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지금까지는 겨우 물을 댈 정도로 나왔는데 지하수가 고갈되고 있으니 밭농사는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세천 주민들에 따르면 대형 관정을 파는데 드는 비용은 500만~600만 원이다. 150m 정도는 파야 풍족히 쓸 물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주민들이 마을회관 앞 밭에 들깨가 사람 키만큼 자라야 함에도 여전히 땅 바닥에 붙어서 햇빛에 말라 위축된 모습을 가리키며 안타까워했다. 콩은 왕성하게 자란 것처럼 보였지만 콩꽃만 핀 채 콩꼬투리가 생기지 않아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혀를 찼다.

■ 신연수, 물 줘도 들깨대신 풀만 자라

신연수 씨

신연수(62) 씨는 광천읍에 나가 살면서 세천마을 고향 집에 매일 달려와 몸이 편찮은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농사를 짓는다. 논농사는 5마지기 반 정도의 규모로 그리 큰 농사는 아닌데 가뭄이 길어지면서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들깨를 심은 500평의 밭에 물을 아무리 줘도 소용없습니다. 풀만 잔뜩 납니다.” 신 씨가 경운기를 이용해 관정의 물을 밭에 대보지만 햇볕이 너무 강렬해 금세 말라버리거나 풀이 먼저 흡수해 버린다고 말했다.

■ 이경만, 소농에게도 관심 필요

이경만 씨

“논은 관정 물로 해결해 나가는데 밭은 포기했습니다.” 11마지기의 벼농사를 하는 이경만(59) 씨는 관정 하나는 벌써 물이 메말라 죽은 상태라고 했다.

“그 동안 정부에 관정을 신청하는 것이 까다롭고 어려웠어요. 관정이 면단위에 몇 개만 할당되는데 신청순위대로 해준다고 합니다. 면단위에 몇 개 갖고 안돼요. 자부담을 더 시키더라도 정부가 보조해주고 관정 시설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만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씨는 정부가 큰 규모의 영농을 하는 농가 위주로 지원할 뿐 소농들에게는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이태순 씨의 밭에 들깨가 오랜 가뭄으로 자라지 못한 채 시들고 있다.

■ 이태순, 관정 필요한데 묵묵부답

이태순 씨

1200평의 밭에 고추, 참깨, 서리태콩, 팥, 들깨를 재배하는 이태순(75) 씨는 세천마을에서 중원마을 사이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밭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비닐로 덮은 두둑의 구멍에 심은 들깨순은 어린 모종 그대로 성장을 멈춘 상태였다.

고추밭에 붉은 고추가 눈에 띄기도 했지만 가뭄이 오래 지속되면서 흉작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다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기도 관정을 뚫어줘야 합니다.” 이 씨는 홍동면에 관정을 신청했지만 묵묵부답이라고 했다. 
 

세천마을 주민들이 마을 진입로의 풀을 베는 작업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위해 마을회관에 모였다.
주민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는 원천리 세천 마을 회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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