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수신(修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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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수신(修身)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8.10.04 09: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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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감정에 치우치는 행동을 했을 때, 곧 후회하게 마련이다. 감정은 이성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만 타인의 ‘공감(sympathy)’을 불러일으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감의 문제를 거론한 철학자는 스코틀랜드의 애덤 스미스였다.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쳤던 그는 ‘국부론’을 저술해 경제학의 아버지같이 알려진 사람이기도 하지만, ‘도덕감정론’을 먼저 출간해 공감의 문제에 천착했다. 그는 중세의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들이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겠는가라고 시대적 전환기에 의문을 표했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 해도 인간 내면에는 타인의 행·불행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원리가 인간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그는 봤다. 공감이란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능력을 말한다. 왜 인간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에 대해 아담 스미스는 ‘상호 공감의 즐거움(pleasure of mutual sympathy)’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라고 답한다. 이런 의식은  서구 시민사회의 밑면을 형성했다.

이렇게 글의 앞머리에 도덕철학자의 말을 끌어들인 것은 누구나 막역하게 지냈던 사람과의 감정충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근본은 그 사람이 예측 가능할 때다. 그 믿음이 깨어질 때 ‘저 인간 저럴 줄 몰랐어!’하고 감정 충돌의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상대방이 처한 입장을 서로 고려하지 않을 때 공감은 일어나기 어렵다. 옳고 그름의 문제 이전에 욱하는 감정이 공감의 부재를 초래한다. 그러면 감정은 이성과 분리돼 독립된 영역에 홀로 존재하는 것일까? 감정은 믿을 것이 못되고 이성은 믿을 만한 것인가? 사람의 감정이 조변석개한다고 분노하는 나의 이성은 타당하고 믿을 만한 것인가? 영국의 데이비드 흄을 거쳐 현대의 철학은 이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지금 막 우물에 빠지려 하는 아이가 있는 것을 본다면 누구나 달려가서 아이를 구해내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는 맹자의 성선설은 차마 남에게 어쩌지 못하는 인정을 베푸는 마음이다. 이렇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여반장(如反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를 했던 시대가 요순시대라면 요순도 사람이고 그처럼 되기 위해 하는 공부가 성학(聖學)이다. 동양의 학문은 성인(聖人)이 되는 학문이며, 수신해 성인의 경지에 올라가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헤겔의 말을 빌리면 수신은 ‘보편성에의 고양’인데 동양적 의미로 보편적 이해와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길러주는 것을 말한다. ‘대학’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다. 자기를 연마하는 것으로 시작해 천하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베를린 대학을 세우고 교양교육을 대학의 중심에 놓고자 했던 빌헬름 폰 훔볼트의 생각과 그리 멀지 않다. 그는 인격자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일을 교양교육으로 보았다.

성인이 되는 일은 수신하고 타자에게 예의를 지키면서 천하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도시문화를 이루면서 예의만 갖고서는 욕심이 교차하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었다. 애덤 스미스도 인구가 얼마 안 되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세계에서 인애(benevolence)로 통하는 덕의 정치가 가능하지만 가치관계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회에서 이기심은 타인의 명예, 재산, 신체를 침해할 수 있으니 사회적 공동체가 공감하는 정의(justice)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덕이 없는 사회는 불편한 채로 존재할 수 있지만, 사회적 정의라는 기둥이 제거 되면 인간사회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몰락할 수 있다.

좋은 사회란 서로 공감하며 인간다움의 정의가 균형을 이루는 사회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예를 지키고, 수신해야 한다고 동·양의 ‘도(道)’는 말하고 있다.

김상구 <청운대 대학원장·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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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2018-10-04 14:55:02
도처에 삭풍이 걸려 춥기만 한 이땅에 발을 딛고 살아감을 자못 아쉬워했다. 뒤엉킨 타래를 풀 수 없을것만 같았다. 글을 읽고 이제 해법을 본것같다. 기쁘다. 공감이 있었다 입이 아닌 가슴에. 다음 세대에겐 조금이라도 더 나은 땅을 물려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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