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文은 인간다움(孝悌忠信)을 실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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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文은 인간다움(孝悌忠信)을 실현하는 것이다
  • 손세제 <철학박사>
  • 승인 2018.11.22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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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아카데미
사진 출처= https://image.baidu.com

자하가 말했다.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서 하며, 부모를 섬길 때 그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길 때 능히 그 몸을 바치며, 붕우와 더불어 사귈 때 말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하리라.”

학이편 제7장의 요지는 결론부터 말하면 ‘학문은 문(文)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도덕(孝悌忠信)을 실천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 점에서 지난 회에 설명한 6장과 동일하다. 곧 ‘입즉효(入則孝), 출즉제(出則悌), 근이신(謹而信)’은 ‘사부모능갈기력(事父母能竭其力), 사군능치기신(事君能致其身)’에 대웅하고, ‘범애중이친인(汎愛衆而親人)’은 ‘현현역색(賢賢易色)’에 대응한다. 이 때문에 6장과 7장은 서로 비슷한 내용의 5장(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과 함께 연상·기억·전송되어 오다 논어를 편집하던 시기에 이 순서대로 편집됐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좀 이상한 점이 있다. 자하(子夏)는 공문십철(孔門十哲) 가운데 문헌 연구 곧 문학(文學) 방면에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제자인데, ‘문(文)에 대한 학습이 충분치 않더라도 도덕 실천(孝悌忠信) 방면에 뛰어나다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학문이 출중한 사람이라고 하겠다’고 한 것이다. 도대체 자하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자하(子夏)는 씨(氏)가 복(卜)이고 명(名)은 상(商)이며 자하(子夏)는 그의 자(字)이다. 그는 온(溫) 나라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가 살던 시대에는 위(衛) 나라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제자전에서 ‘(자하는) 위(衛) 나라 사람이다’고 한 것이다. 온 땅은 뒤에 진(晉) 나라의 세력 범위에 들어갔고, 진 나라가 한(韓)·위(魏)·조(趙) 등 세 나라로 분열된 이후에는 위(魏) 나라에 들어가게 됐다. 그래서 위 문후(魏文侯)의 스승으로 봉직했다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말년에 자하는 서하(西河)에 거주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했다고 하는데 서하도 그 부근에 있었다. 대개 말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자하는 공자가 천하 유력에서 돌아왔던 BC484년경에 입문했다. 공자보다 44세 적었다고 하니 공자가 천하유력에서 돌아왔을 때(68~69세)에는 24~25세 정도 됐고, 공자가 몰한 때에는 29~30세 정도 됐을 것이다. 공자는 BC479년 73~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논어에 보이는 공자와 자하의 문답은 대개 이 5년 동안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 사이 자하는 거보(莒父)의 재(宰)로 취직하기도 했다. 자하는 자유(子游)와 함께 문학(文學) 방면의 수재였다. ‘문학’이란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교양을 말하는데 요즘 말로 하면 고대의 역사·문화·철학·사상 등이 담긴 고전에 대해 탁월한 이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논어에는 자하의 이름이 17번 나오는데 자로(子路)·자공(子貢) 등을 제외하면 그 이름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 셈이다. 증자(曾子)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 문하의 제자들이 논어의 편집에 간여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증자는 많은 제자를 두긴 했지만 공자 생전에는 아직 자립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장(子張)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공자 말년의 공문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제자가 자장이었던 데에 기인한다. 제(齊) 나라에서 성립한 제논어(齊論語)에는 자장편이 2개 있었다고 한다. 자로와 자공은 말할 것도 없이 공문의 고족제자(高足弟子)다. 자하는 비교적 착실했고 노력을 쌓는 것을 중시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노력가 형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서예가들이 즐겨 쓰는 ‘널리 배우고(博學) 뜻을 도탑게 하며(篤志) 절실하게 묻고(節文) 가까이 있는 자신에게서부터 생각하면(近思)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라는 문구는 자하가 제자들에게 일러준 교훈이다(자장편6). 견고하고 신중한 학자의 풍모가 느껴진다. 또한 자하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군자(君子)는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은 뒤에 백성을 부리니,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들이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여긴다. 군자는 신임을 얻은 뒤에 간(諫)하니,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윗사람이 자신을 비방한다고 여긴다.’(자장편10)

자하가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데에는 공자의 자태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공자는 ‘온화하면서도 엄숙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고, 공손하면서 편안했다’(술이편37)고 한다. 자하(子夏)는 정곡(正鵠)을 찔러 그 본질을 표현하는 풍이 아니라 분석과 종합을 거쳐 학적으로 탐구하는 풍이었다. 이런 면은 공자에 대한 평에서도 나타난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의 변함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하고, 그 앞에 다가가면 온화하고, 그 말을 들어보면 명확하다.’(자장편9) 관찰·분석·종합이 자세하면서도 엄밀하다. 자하는 내면의 성실을 중시해 외면의 허식으로 달려가는 것을 몹시 경계했다. ‘소인(小人)은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文飾한다’(자장편8). 이것도 공자의 가르침에 따른 말일 것이다. 언제가 자하는 공자에게 효(孝)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일러줬다. “어버이의 안색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 가장 어렵다. 일이 있으면 아우나 아들이 그 노고를 대신하고, 술이나 밥이 있으면 부형께서 먼저 드시게 하는 것, 이것을 효라고 생각했더냐?”(위정편8) ‘지성(至誠)’이 중요함을 일깨워 준 가르침이다. 자하에게 속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가 능력을 발휘하려면 시간을 두고 노력을 쌓게 해야 한다. 그래서 공자도 자하가 거보(莒父)의 재(宰)가 되어 정사에 대해 물어왔을 때 “안달해 하거나 초조해 하지 말라.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라. 대사가 눈앞에 있을 때에는 목전의 이익에 연연해하지 말라.”고 일러줬다. 욕속즉부달(欲速則不達) 견소리즉대사불성(見小利則大事不成)(자로편17)의 격언이다. 공자는 자하의 재질을 알아본 것 같다. “너는 군자유(君子儒)가 되 거라.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아라.”(옹야편11)

‘군자유’란 군자의 교양인 시서예악(詩書禮樂)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이에 대해 ‘소인유’는 항간(巷間)의 장례식장이나 제례(祭禮) 혹은 의식(儀式)을 ㅤ쫒아 다니면서 의례를 행하던 일종의 직인(職人)이다. 유(儒)는 원래 제사나 의례 등을 전문적으로 맡아보던 직인이었다. 그런데 공자가 이 유(儒)가 전한 전통(術)에서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 문화의 정신(인간다움)을 발견하고,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교양을 확대·심화시켜, 유(儒)의 기예(術)를 ‘군자의 학’ ‘인간다움을 구현하는 학’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 이후 그 흔적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오늘날 사회 일각에서 제사나 지내고 의례나 쫓아다니는 속유(速儒)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이었다. 평화시에는 처사(處士)로서 향리의 교화에 힘쓰고, 위난 시에는 사생취의(捨生取義)를 실현했던 유(儒)들이 바로 ‘군자유’다. 양차에 걸친 홍주의병전쟁·3·1만세운동·파리장서운동·독립전쟁에 참여했던 영웅들은 바로 이 ‘군자유’의 정신을 본받은 사람들이다. ‘백공(百工)은 공장에서 자기 일을 이루고 군자(君子)는 배워서 그 도(道)를 이룬다.’(자장편7) 말이 상기된다. ‘학문은 문(文)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도덕(孝悌忠信)을 실천하는 것이다’는 말은 ‘군자유’와 관계가 있는 말이다. 자하의 반성과 자각이 농축된 교훈이다. 현자·부모·군주·벗 등 각종 경우를 빼놓지 않고 열거해 현(賢)·효제(孝悌)·충(忠)·신(信)의 덕목을 제시한 데에서 그다운 학구열이 엿보인다.

자하는 문학(文學)에 힘써 자유(子游)와 함께 공문 최고의 ‘문학지사(文學之士)’라는 명예를 얻었다(선진편2). “시(詩)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웃는 모습도 예쁜데 보조개까지 있구나! 눈도 아름다운데 눈동자까지 선명하구나! 흰 비단으로 채색을 한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답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한 뒤에 하는 것이다(繪事後素).” “예(禮)가 뒤라는 말씀이십니까?” 예로부터 전해오던 시(詩)를 종횡으로 살피고, 우의적(寓意的)으로 활용해 교양인이 지녀야 할 생활 태도를 임기응변 식으로 표현한 문장인데, 단장취의(斷章取義)에 능했던 자하의 모습이 상기된다. 언젠가 동문인 사마우(司馬牛)가 형제가 없음을 한탄한 적이 있다. 사마우는 성실하고 순정적인 사람인데 형제(桓魋)가 불의(不義)한 짓을 저질러 항상 눈물에 젖어 지냈다고 한다. 그러자 자하가 위로해줬다.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있고 잘 살고 못사는 것은 하늘(天)에 달려 있는데, 군자가 어찌 형제 없음을 걱정하리오? 사해(四海)가 다 형제라는 말도 있지 않소?” 따뜻하고 깊이가 있고 인정과 도리가 넘쳐나는 말이다. 시(詩)에서 단장취의(斷章取義)하고 서(書)에서 전고(典故)를 마련해 위로한 것이다. 자하의 진솔하고 뜻깊은 이해력·뛰어난 설득력이 엿보인다. 교육자로서 많은 제자를 두고 인재를 양성했음을 짐작케 한다. 현대인들은 지식과 능력(스펙)을 쌓는 데에만 집중하고 인간의 기본 도리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면적 가치보다 외면적 치장에 더 몰두한다. 그러나 지식과 능력이 가치와 힘을 발휘하려면 인간됨의 기본 도리가 뒷받침돼야 한다. 자하는 매우 뛰어난 학자였지만 지식보다 소중한 것이 인간됨의 기본 도리를 충실히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바탕이 돼야 학문을 하더라도 성취할 만한 게 있다고 본 것이다.

“배우기를 널리 하고 뜻을 독실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있는 것에서부터 생각하면 사람다움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작은 재주(技藝)라고 왜 익힐 만한 것이 없겠느냐? 다만 원대함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될까 두려워 군자는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다.”(자장편4),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食) 월식(月食)과 같아서, 잘못을 저지르면 사람들이 바로 알게 된다. 그러나 잘못을 고치면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본다.’(자장편21) ‘안달해하거나 초조해 하지 마라.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목전의 이익에 속지 마라. 안달해 하면 뜻을 충분히 펼칠 수 없다. 작은 이익에 속으면 큰일을 완수할 수 없다.’ 위정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 아닌가 한다.

<이 강좌는 홍성문화원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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