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의 도시와 삶을 사랑한 청년,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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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도시와 삶을 사랑한 청년, 기형도
  • 김옥선 기자
  • 승인 2019.01.0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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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의 검은 잎 기형도 저 | 문학과 지성사 | 9000원

삶을 고뇌하던 한 청년은 컴컴한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다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사인은 뇌졸중이지만 왜 청년이 극장 안에서 홀로 죽어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당시 청년의 나이는 29살이었다. 기형도 시인의 이야기다. 1990년대 방황하던 내 청춘에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은 그렇게 힘이 됐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트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아무리 찾아 헤매어도, 허공에 발길질을 해보아도, 아스팔트 위에 가래침을 웩 하고 내뱉어도 가려진 청춘의 앞길은 도저히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분노하고, 질투하고, 책망하는 일이 전부였던 그 시절, 기형도의 시는 나에게 공감의 영역을 확장했다. ‘아, 나만 이러는 것은 아니구나’하는 안도의 한숨 같은 것 말이다. 

기형도 시의 원천은 가난이다. 기형도는 1960년 음력 2월 16일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에서 기우민(奇宇敏)의 3남 4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황해도에서 피난 온 부친은 교사직을 그만두고 당시에는 연평도의 유일한 행정기구였던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서해안 간척사업에 손을 댔다가 정부보조금의 중단과 행정기관의 압력 끝에 실패하고 새로운 터전으로 삼은 것이 시흥이었다.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에 정착한 뒤 부친은 착실하게 농사를 지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다. 그러다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어머니가 어렵게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신림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를 연속해서 수석으로 졸업한 기형도는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 정법계열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한 뒤 연세문학회에 가입해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한다. 성석제, 조병준, 이영준, 원재길 등이 연세문학회 때의 친구들이다. 기형도는 단정했고,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었으며, 시를 사랑하는 문학청년이었다. 1984년 10월, 중앙일보에 입사하고, 그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던 시 ‘안개’가 당선됐다. 1985년 2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수습기자 딱지를 뗀 뒤 정치부에 배속된다. 이후 중앙일보 문화부를 거쳐 편집부에서 일했다.

故 기형도 시인

기형도의 시집은 사후에 출판된다. 기형도는 시집 출간을 염두에 두고 꼼꼼하게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의 너무나 이른 죽음이 앞지르기를 해버린 것이다.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 종로 3가 파고다 극장의 한 좌석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사후 출간된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 제목은 평론가 김 현이 정한 것이다. 도시에서 살았던 나에게 도시는 불능의 도시였다. 네온사인이 번화한 곳을 잠시 피해 후미진 골목 입구에서 짬뽕 국물과 함께 먹은 것을 게워내면서 기형도의 시를 떠올렸다.

저들은 왜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드는가/저 청년들의 욕망은 어디로 가는가/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가/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나쁘게 말하다’ 중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봄날은 간다 중)’에 낮술을 마시며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오래된 서적 중)’라며 나를 자책하던 시절, ‘나는 기적을 믿지 않았다.(오래된 서적 중)’ 그리고 가끔 탄식했다.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여행자 중)’라고 절규하며 길 위에서 중얼거렸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중)’라고 말이다.

인생을 증오하고, 삶이 권태롭고, 생활이 대수롭지 않아 늘 위태로웠던 한 남자. 만약 시인이 죽지 않고 살았다면 그의 시가 아직도 그러했을까? 아직도 시인에게 도시는 회색의 우울한 그림자고, 내 안에 쌓인 침묵이 두려웠을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됐다. 기형도는 회색의 암울한 도시를 사랑했고, 자신의 권태로운 삶을 그야말로 열렬히 사랑하고 옹호했던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올해는 기형도 시인이 죽은 지 30년이 되는 해다. 출판계는 기형도 30주년을 맞아 다양한 문학행사를 준비한다고 한다. 시를 읽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시를 나누지 않는 사회는 공감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하는 사회다. 시집 한 권을 쓰기 위해 자신의 피를 토하는 시인들의 세상을 향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삶에 대해 고뇌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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