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知)자는 요수하고, 인(仁)자는 요산이라'
상태바
'지(知)자는 요수하고, 인(仁)자는 요산이라'
  •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 홍성고 20회)
  • 승인 2010.03.08 14: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3구간

산행일자 : 2010년 2월 20일~21일
구 간 : 성삼재-만복대-정형치-고리봉-노치마을-수정봉-여원재
도상거리 : 20.6km
산행시간 : 9시간 30분 소요

 

 

 

 

 


최근에는 주 5일제 근무, 공무원들의 연가사용, 건강 지키기 등 수 많은 갖가지 사연을 안고 휴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삼삼오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까닭이다. 옛 사람들은 산과 강이 서로를 넘보지 않는다고 여겼다. 비록 높은 산이 이웃해 있어도 사이에 물이 있으면 산줄기는 돌아갔고, 평야에서도 산맥이 흐르면 물줄기는 물러선다고 했다. 백두대간은 그렇게 산과 물이 평화로운 한반도를 달린다. 특히 산꾼들에게 백두대간의 의미는 속이 더 깊다. 백두대간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민중의 한이 서린 지리산까지 거침없이 뻗어 내린 산줄기다. 금강산을 넘고 설악산을 거쳐 오대산과 태백산, 속리산을 이어 달린다. 그 힘이 하도 세차고 맑아 한반도를 받치고도 남는다.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닿아서도 숨가쁨을 모른다. 그 장엄한 달리기에서 이 땅의 숱한 물줄기를 낳고, 평야를 길러낸다. 백두대간은 곧 이 땅이며 생명이다.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서울본부장·홍동출신·홍성고 20회)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한 산행기를 연재,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편집자 주>

 

 

 

 

 

 

 


백두대간 두 번째 날이다.

밤 11시 30분경 잠실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야경이 아름다운 한강변을 달리면 언제나 마음은 설렌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처럼. 산행대장이 산행안내지도를 나누어주며 이번 종주는 제 2구간인 벽소령에서 성삼재까지인데 산불강조기간이라 통제하므로 5월로 미루고 제3구간인 성삼재에서 여원재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논어에 '지(知)자는 요수하고, 인(仁)자는 요산이라'는 말이 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인 지자는 사물의 이치를 깨닮에 있어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아서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인자는 의리를 소중히 함에 있어 태산과 같이 변하지 않으니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물이 움직여서 맑은 것이나, 산이 멈추어서 변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 말로 우리네 인생의 삶이 물 같기도 하고 산 같기도 한 이유가 아닐 런지? 물을 좋아하든, 산을 좋아하든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나 혜택은 참으로 큰 것이다. 우리가 오늘 산행을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겠지만, 우뚝 솟아 있으나 교만하거나 거만하지 않는 산에 겸손한 덕목을 배우고 닮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우리 모두를 사랑하고 남에게 베풀고 용서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느새 출발지 성삼재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마치고 새벽 4시 30분경 출발한다. 오늘도 선발대 맨 앞에 서서 깜깜한 밤하늘에 달님과 별님들의 환영을 받으며 만복대로 향한다. 성삼재는 삼한시대에 각성바지 3명의 장군이 지키던 수비성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구간은 지리산의 주능선에 속하지 않기에 길이 좁다.

만복대에선 시원스레 펼쳐진 능선을 수놓은 억새가 부르는 은빛 노래를 들어야 제격이지만 억새 대신 상고대의 아름다움이 장관이다.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상고대 너머로 지리산의 연봉들을 바라보며 멀리 천왕봉이 보일 듯 말듯 아득하다. 풍수적으로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만복대 능선은 심원계곡이 있는 동쪽 4면은 완만하고 산동마을이 있는 서쪽 4면은 급경사를 이룬다. 따라서 서쪽의 남원, 구례, 운봉 같은 큰 마을로부터 접근하려면 가파른 능선은 자연스레 천혜의 요새가 된다. 이 때문에 멀리로는 마한 왕조의 피난처요, 가깝게는 빨치산들도 심원계곡 일원에 진을 치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오전 7시 20분경 만복대를 뒤로하고 정령치로 향한다. 기원전 84년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정장군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는 정령치에 8시 20분경에 도착하여 아침 식사를 한다. 전남 주천면과 산내면을 이어주는 정령치, 이곳에서 300m 쯤 옆에 개형암지 마애불상(보물 1123호)은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식사 후에 산행은 역시 숨이 찬다. 큰 고리봉(1304m)에 오르니 오른쪽은 멀리 바래봉 가는 길이고, 왼쪽은 대간길이다. 내리막 눈길은 조그만 실수도 위험하다. 대원 중 한사람이 미끄러져 가벼운 상처를 입는 불상사가 있었으나 다행히 고기리 삼거리까지 내려왔다. 이곳 고기리 삼거리에서 노치마을까지 2km 구간이 백두대간 중 유일하게 가장 긴 아스팔트길이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노치마을에 오전 9시 40분경 도착, 노치샘물에 목을 적시니 막걸리보다 시원하다. 마을 뒤편에 있는 노송지대를 지나, 운봉읍 행정리와 이백면 양가리 경계의 산으로 옛날 산 중턱에서 수정이 채취되어서 붙여진 수정봉을 향한다.

천석꾼이 셀 수 없이 많고, 유명한 만석꾼도 냈다는 운봉고원은 정말로 너른 들판이다. 이 지역은 동학군도 못 넘었던 여원재 부근에 널려있는 동학혁명의 파편들,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찔러 전쟁영웅으로 부상한 황산 싸움터 등 보이는 것마다 주저리주저리 사연을 들려주는 곳이다.

그러나 뭐니 해도 이 지역의 보배는 판소리다. 판소리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동편제가 이곳 운봉에서 발생했으며,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인 흥부가의 배경이 된 마을이다. 제사 때마다 제사상을 차리는 제기는 오래전부터 운봉의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백두대간 분수령의 큰 고리봉에서 발원한 광천이 경호강으로 흘러가는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 들머리의 아름드리 솔밭이 제법 운치 있는 이 마을은 고려말 이성계의 황산대첩 배경 마을로도 알려졌지만, 국악인들에겐 성지 같은 곳이다. 동편제 창시자로서 판소리계에서 최고의 칭호인 <가왕>으로 불리는 송홍록 명창이 이 비전마을에서 탄생했다. 송홍록-송광록-송만갑-박봉래-박봉술-박초월로 이어지는 판소리 200년의 꽃을 피운 곳이다. 피 터지는 싸움터였던 이곳에서 풍요로운 전통문화가 싹틀 수 있었던 문화적 자원은 지리산의 예술적인 기운과 사람살기 좋은 고원지대에서 생산되는 물산이 있기에 가능했다. 통일신라 때 옥보고가 거문고를 가지고 50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운상원이 바로 이 운봉이라는 사실도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오전 11시 50분경 수정봉(804.7m)에 올라 막걸리에 목을 축이고 여원재로 향한다. 백두대간의 수정봉과 고남산 사이, 남원에서 운봉 가는 길목의 여원재는 백두대간 중 가장 남쪽에 있는 큰 고개다. 영남과 호남의 길목이면서 비옥한 고원지대가 펼쳐져 있으니, 유사 이래 전투가 있을 때마다 이곳은 항상 쟁탈의 대상이 되곤 했다.

고려 말, 고갯마루 주막에 살던 젊고 아리따운 주모의 전설은 그래서 슬프다. 영호남을 오가는 길손에게 웃음으로 밥과 술을 내놓는 신세라 해도 어찌 왜구에게 몸을 빼앗기랴, 왜놈 손을 탄 왼쪽 젖가슴을 스스로 도려내고 자결하고 말았던 것이다. 죽은 주모의 도움으로 황산 싸움에서 승리한 이성계는 전투가 끝난 후 고갯마루에 여원이란 사당을 짓고 여인의 넋을 달랬으며 이후 주민들은 이 고개를 여원재라 불렀다. 지금 여원재 도로 아래의 암벽엔 왼쪽 젖가슴이 없는 마애불이 서 있다. 전설의 여인과 마애불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인적 드문 고갯마루 마애불 앞에 서 있으면 문득 차가운 암벽에서 전설의 여인이 뛰쳐나와 옛 이야기를 전해줄 것만 같은 상상에 사로잡힌다.

오후 1시 30분경, 9시간 30분 만에 오늘도 마지막 목적지 여원재에 도착하였다. 순두부와 지리산 산나물이 가득한 전라도 토속음식의 맛이란~.

오후 4시경에 출발하여 오후 7시경 서울 잠실에 도착했다. 생맥주 한잔의 유혹을 뿌리치고 다음 산행을 약속하며 아쉬운 이별을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