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영남대로의 큰길 새재로 이름 높은 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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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영남대로의 큰길 새재로 이름 높은 고을
  • 유태헌
  • 승인 2010.10.2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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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17구간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홍동출신, 홍성고 20회, 손전화 010-3764-3344)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해 산행기를 연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0년 10월 2일~3일
구 간 : 버리미기재-장성봉-구왕봉-희양산-배너머평전-은티마을
도상거리 : 18.8km
산행시간 : 10시간 소요


비가 내리는 어둠으로 가득한 밤 11시가 넘어서 잠실을 출발한 버스는 고속도로를 지나 헤드라이트 불빛을 밝힌 채 꼬불꼬불한 국도를 달리며 새벽 02시30분경 버리미기재에 도착했다. 야간 산행을 위해 장비를 챙기고 비를 맞지 않으려고 우의를 입는다. 대간 길을 막아놓은 철책을 우회하여 렌턴 불빛에 의지해 입산을 하는데 대간길은 이곳을 찾은 불청객이 반갑지 않은 듯 지나칠 때마다 숲 풀들은 머금은 물기를 뿌리며 쏟아지는 빗물과 함께 옷깃을 적신다. 정현종 님의 '하늘을 깨물었더니' 시가 떠오른다.

'하늘을 깨물었더니, 비가내리더라. 비를 깨물었더니, 내가 젓더라.'

그래 비 맞을 각오를 단단히 하자. 장대비가 내려 꽂힌다. 이런 비는 꼿꼿이 서서 맞는 것이 옳다. 갑작스레 폭우를 만났을 때 한 방울이라도 덜 맞을까 싶어 종종 걸음을 하다가 흠뻑 젖고 나서야 갈지자로 흔들리던 마음이 어느 곁에 포기하고 만다. 안도 보다 한 박자 느린 체념, 그 아둔한 고집에 미리 당부한다. 이번엔 다 내려놓고 비 맞고 가자고..... 지금 어디쯤 대간 길을 오르고 있는 것인지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일기가 못내 답답한 마음으로 산모퉁이를 오르고 내려서기를 반복하는데 어디선가 시원한 새벽바람이 능선을 타고 불어오면 땀과 비로 질퍽하게 젖은 열기로 가득 찬 심신을 상쾌하게 씻어 주는 바람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몸을 식히고 물 한 모금 마시며 오르다보니 비와 안개로 가득한 어둠속에서 장성봉(916.3m)이라고 한자로 적어놓은 정상석이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백두대간분수령은 버리미기재를 지나면서 거대한 능구렁이처럼 갈지자로 심하게 요동을 치는데, 이화령도 지나고 새재(조령)도 넘어 하늘재까지 이어진다. 처음엔 북쪽이던 대간길이 어느새 서족이고 서쪽인가하면 이번엔 동남쪽으로 돌아가고 갑자기 북으로 향하다 다시동남쪽으로 되돌아 한 없이 내려간다. 그러다 갑자기 서북쪽으로 330도 휙 돌아가다가 다시동남쪽으로 300도 휙 돌기도 한다. 산줄기라는 것이 본래 자처럼 반듯한 것은 아니건만, 이 구간만큼은 길을 잃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 직선거리로 2km코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반나절이나 빙 돌아서 가야하는 곳도 있다. 장성봉을 지나면서 대간 길은 왼쪽엔 괴산, 오른쪽엔 문경고을을 끼고 간다. 괴산은 양반 전통이 잘 남아있는 고을이고 문경은 영남대로의 큰길인 새재로 이름이 높은 고을이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서쪽에서 백두대간의 허리를 떠 바치고 있는 숨은 명산인 장성봉는 마치 거대한 만리장성의 일부를 보는듯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성봉은 북쪽에서 남진하는 백두대간이 희양산에서 서쪽으로 꺾여다가 악휘봉을 솟구친 후 다시 직각으로 꺽여 남쪽의 대야산으로 치닫는 중간에 우뚝 솟아있다. 장성봉 북쪽계곡은 봉암사가 있는 봉암용곡으로 솜다리(에델바이스)가 거식하며 수정광산이 서너 개 있던 곳이다. 03시50분 장성봉을 출발 15분정도 급경사를 내려서 막장봉 갈림길 이정목을 만나게 되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정목은 보이지 않고 짙은 안개와비로 시야를 가려 백두대간 중 처음으로 50여분 알바(길을 헤메는 것)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간 길에 들어서니 처음 왔던 길이 맞았다. 무려 이 길을 세 번이나 헤맸다 .

충북괴산군 칠성면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를 이루는 막장봉은 살구나무 골에서 갈라진 시묘골이 협곡을 이루어 광산의 갱도처럼 생겨 그 마지막에 있는 봉우리라 하여 막장봉으로 불려졌다. 대간 길에서 비켜있는 막장봉을 우측으로 끼고돌아 크고 작은 고개를 서너개 넘어 헬기장이 있는 안부에 도착하니 비도 멎었다. 식사를 하기위해 후미를 기다리며 비와 땀에 젓은 몸을 보호 하기위해 쟈킷을 꺼내 입는다. 지난 대간 길까지만 해도 시원한 맥주와 막걸리가 인기였는데 이젠 따뜻한 커피가 더 그립다. 식사를 마치고 대간 길에 접어들면 악휘봉까지 심한 오르막이다. 악휘봉 삼거리에 도착할 때까지 선발대장 뒤에서 혼자 왔다. 어차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 가족과 친구가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의 힘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만의 산행도 마음을 정리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같다. 악휘봉(845m)은 괴산군 연풍면과 칠성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본줄기에서 한 발짝 벗어난 절경의산이다. 정상부근은 온통 기암괴석과 노송 및 고사목으로 이루어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데, 인근의 희양산에 비하여 바위의 덩치가 작을 뿐 모양이나 기묘한 형상은 더없이 아기자기하며 아름답다. 또한 악휘봉에서의 조망은 환상적이다. 남으로는 지나온 막장봉과 장성봉, 그리고 애기봉이 만리장성처럼 드러누어 있고 동남쪽으로는 구왕봉 넘어 희양산이 희멀건 바위자랑을 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칠보산과 군자산이 선명하다. 특히 북동쪽으로는 조령산과주흘산 넘어 월악산의 영봉이 아른거리다. 이렇게 조망이 좋건만 짙은 안개로 볼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 동남쪽으로 급하게 휘돌아 내려가면 은티재에 도착한다.

 

 



고갯마루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고개 이름과 같은 은티마을이고, 우측으로 가면 몸가짐을 추스르게 하는 봉암사가 터를 잡은 봉암용곡 이다. 은티재에서 구왕봉으로 오르는 길목 산기슭엔 봉암사에서 설치한 목책이 쳐져있고 출입을 통제하기위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번을 서는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봉암사 주지스님 이름으로 쓰여진 글귀는 조심스럽지 못한 중생을 부드럽게 타이른다. '일체 중생이 번뇌 틀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으니, 출가인은 분발하여 사람마다 본래 부족한 불성을 바로보아 사람과 천상이 스승 됨이라. 이곳은 그와 같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청정도량이므로 현명하신 여러분께서는 출입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긴 목책 울타리가 반드시 수행자들을 위한 길도 아니고, 자연 또한 수행자들만 위한 것도 아닐진대 안타깝다 .

주치봉(683m)넘어서면 백두대간 분수령은 한숨 죽였다가 다시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구룡봉 으로도 불렸던 구왕봉(877m)이다. 지중대사가 봉암사 주춧돌을 세울 때 그 자리의 연못에 살고 있던 용을 신통력으로 쫏아 냈는데 당시 쫓겨난 용들이 자리를 잡은 산봉우리라 해서 구룡봉이라 불렸다고 한다. 아홉 마리 용의 명예가 헛되지 않을 정도로 암봉의 생김새가 제법 빼어나다. 그러나 아무리 구왕봉이라 해도 희양산의 미학을 어찌 따를 수가 있을까. 가파른 구왕봉을 내려서면 연풍과 가은을 넘나들던 가장 빠른 고개였다는 지름티재에 도착한다. 숨을 고른 대간 길은 가빠른 희양산으로 오른다.

 

 

 



희양산은 자신의 이마를 쉽게 내줄 수 없다는 듯, 손과 발을 다 써야 하는 직벽의 바위길이 앞을 막는다. 로프에 매달려 힘들게 안부에 오르면 백두대간에서 벗어난 희양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 배낭을 내려놓고 15분정도 가볍게 희양산(998m)정상에 오른다. 정상에서의 전망은 빼어나다 . 군더더기 없이 솟아오른 암벽의 자태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범접하지 못할 위험도 지니고 있다. 남쪽 바위 아래 울창한 숲속에는 봉암사가 자리 잡고 있다. 백두대간을 서북쪽으로 깊숙이 찌르고 들어가 백두대간을 굽이돌게 만든 봉암용곡, 그리고 그 너머로는 그동안 지나온 장성봉, 대야산, 청화산 분수령이 손에 잡힐 듯한데, 돌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속리산은 가물거린다. 가야할 북쪽으로는 역시 구렁이처럼 몸을 트러가며 이어진 백두대간 분수령이 선연하다.

이처럼 돋보이는 명산 희양산에 자리 잡은 봉암사는 1600여년간 우리겨레의 정신을 이끌어온 불교에선 생명수처럼 소중한 가람이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남긴 유명한 사산비명중 하나인 "봉암사 지중대사비문󰡑에 창건 내력이 자세히 전한다. 비문에는 병풍같이 사방을 둘러싼 산은 마치 큰 봉황이 구름을 흔들며 날아오르듯 하고, 백겁으로 굽이도는 물은 뿔 없는 용이 허리를 돌에 걸쳐 누워있는 듯하였다. 이에 지중국사가 감탄하고 󰡐이 땅을 얻었다는 것은 어찌 하늘에 뜻이 아니겠느냐? 만약에 이곳에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아마도 도적의 소굴이 될것이다"라 하고, 마침내 대중에 앞장서서 화란의 근원을 막고 터를 잡아서 기와집과 네 기둥으로 지기를 눌렀으며 철불2구를 구조하여 절을 지켰다." 당대 사상을 이끌었던 9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선문의 가풍을 여기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광복 후 이태가 지난 1947년 겨울 성철스님을 중심으로 청담, 자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등 20여명의 젊은 스님들이 이곳에 모여, 일제 35년 동안 일그러진 불교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봉암사 결사'로 혁신의 싹을 틔운다. 이들이 내세운 것은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자'는 간결한 정신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봉암사 결사'는 불법에 어긋나는 불공과 천도재를 받지 않고 수좌 자신이 노동하여 생활하자는 방침을 정하였다. 즉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맹세로서, '하루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나무해오고, 물 긷고, 밭 갈고, 탁발을 일상화 하였다. 또한 스님들의 왜색뿐 가사, 장삼, 발우 등의 개선을 시도했으며, 오늘날 삼보에 대한 예로 정착된 '삼배'가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천도재 등의 법회에서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독송이 보편화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봉암사의 선풍은 1982년 6월 봉암사를 조계종을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특별수도원이라 참배객이나 관광객의 출입을 일체통제하고 오르지 참선과 정진에만 몰두하는 수행도량이다. 봉암사는 4월 초파일날 하루 일반인들을 위해 문을 연다. 허나 스님들의 뜨거운 정진을 궁금해 하는 중생들은, 봉암사도 드나들고 희양산의 여러 산길도 두루 걷고 싶어 하면서 가끔 불평 아닌 불평을 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거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하신 서암 스님은 생전에 봉암사의 필요성을 이렇게 역설했다. "사찰은 수행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예공의 공간이기도하고, 중생교화의 공간이기도하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라도 봉암사 같은 도량은 한국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라고...

봉암사 못 가본 아쉬움을 뒤로하고 희양산성을 넘으면 배 너머 평전에 도착한다. 여기서 백두대간은 수리봉을 지나 이화령으로 이어지지만 다음을 약속하며 은티마을로 접어든다. 그림 같은 은티마을을 바라보며 좌측능선과 계곡을 따라 40여분 내려오니 물소리 크게 들리는 마을 도로에 이르른다. 길옆엔 빨강사과, 감, 고추, 수수, 벼 등 농부들이 땀 흘려 애써 가꾼 오곡백과가 가을의 해살을 받아 무르익고 있다. 마분동 등산안내도와 남근석, 은티마을 유래비가 서있는 은티마을에 도착하여 대간꾼들의 단골 주막에 들려 구수한 아줌마의 입담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니 중생의 수다에도 희양산은 말이 없고, 긴 그림자 재 넘어 하늘에 닿는다. 경의롭고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베일에 가려진 희양산 선계속의 하루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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