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기사
오피니언
전체
감성노트
고사 나들이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 이야기
공감엽서
공감시선
교단일기
곤충의 신비
기자수첩
기자의 눈
길 위에서
김상구 교수의 논단
내 삶을 바꿀 인생 책
내포의 창
너나들이
노년의 삶
노동문학책 이야기
녹색상상력
녹색체험
눈꼽재기창
데스크 시감
데스크 칼럼
독자기고
독자 시
돋보기
동행
마을여담
마음산책
마을이야기
매혹적인 영화인문학
명상의 숲
문화칼럼
문학카페
박영준 원장의 한방의학 칼럼
베를린에서 온 편지
법률상식
뷰파인더
사색의 뜰
사설
산책로
삶, 등대불빛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세상보기
세상읽기
세정독백
소소당당
숲이야기
그건 그래
시사칼럼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시선1318
시평
아무튼 환경시민
아실세배권
여하정 산책
우암 단상
의정칼럼
의학칼럼
인생 이모작
저출산·고령화시대, 삶의 창·희망보고서
정책과 시선
조양로
조사(弔辭)
지역을 바꾸는 녹색문고
직언직설
청·진·기 마음in
캐나다통신
특별기고
하승수 칼럼
홍주로
홍주문단
홍주산책
홍주성지의 뜰
희망봉
기획특집
전체
2009년 기획취재
손규성의 홍주골 톺아보기
한관우의 홍성비전 희망수첩
2010년 기획취재
홍주골 2050 희망 리더
홍주골 골목 기행
우리동네 행복마을
6.25전쟁 60주년 특집연재
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산꾼 유태헌의 전국 100대 명산 산행기
지역농업 특화사업으로 농업 경쟁력 키운다
2011년 기획취재
홍성의 도시브랜드, '문화·예술이 답이다'
경관농업, 홍성군의 새로운 농촌 소득창출 대안이다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2012년 기획취재
FTA파고 넘는 농축산 블루오션, 친환경이 답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사회적기업이 해법이다
삼성-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고 5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다
척박한 지방문화현장에서 이응노 기념관의 활로 찾기
폐교, 지역 구심점으로 거듭나다
농어촌체험관광,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바람직한 홍성·예산 통합 방안을 찾다
빗물활용, 녹색성장도시로 가는 출발선이다
전통과 현대의 어울림, 한옥마을 도시브랜드화 전략
지역사회복지, 사회적경제로 실현하자
농촌경제, 희망을 찾아서
2013년 기획취재
마을을 먹여살리는 마을기업
지역경제 선순환 활성화가 해답이다
'홍주' 지명역사 1000년, 기념사업 추진하자
폐기물도 자원이다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친환경농축산 앞당기는 가축분뇨 공동자원화
문화예술로 바라본 공유경제
가축분뇨 자원화로 친환경축산 앞당긴다★
사회적경제로 해법찾는 도시재생
한관우 본지 발행인, 유럽의 지역신문을 가다
2014년 기획취재
도시재생사업, 지역의 경쟁력이다
친환경 녹색도시의 시작 자연형 하천복원
환경파괴가 부른 재앙 충청해안의 토사퇴적
만해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아서
홍성농업, 농민과 친환경이 답이다
홍성이 낳은 세계적 화가 고암 이응노
장희구 박사의 만해 한용운의 시 읽기
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2015년 기획취재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위기의 독거노인, 그룹홈이 대안일까?
바다영토경계분쟁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
지역신문의 콘텐츠와 매체다각화
말산업과 지역경제
뭉쳐야산다, 사회적협동조합
홍성을 세계적인 오카리나 메카로 만들자
지명역사 1000년 ‘홍주’ 고유지명 되찾자
광천젓갈의 생존전략 공생이 답이다
홍성의 골목상권 경쟁력 테마로 승부한다
농촌의 소규모 학교가 살아야 지역도 살아난다
옛골목길, 스토리와 디자인을 입혀야 뜬다
사라지는 전통가업, 대를 잇는 사람에게 길을 묻다
홍성, 폐기물 재활용·생태환경 예술의 메카로 만들자
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
홍성을 작은 박물관도시로 만들자
홍성의 옛 고유지명‘홍주’를 함께 찾아요
2016년 기획취재
물부족 가뭄극복, 빗물활용 물관리가 경쟁력이다
청년의 창의적인 생각이 창조농업이끈다
고령사회 홍성, 노인고용에 눈을 돌리자
역사문화도시 홍성, 지역문화재단 통해 현실화 되나
작은 동네책방의 희망과 전략, 공동체문화예술 소통공간을 꿈꾸다
용봉산평화인권공원(가칭) 어떻게 조성해야 할까?
<사람이 희망이다>홍성의 인맥-홍성출향인을 찾아서
자유학기제, 농촌학교와 마을을 잇는다
홍주지역 중고제와 한성준의 맥, 그 소리와 가락의 복원
홍성 문화예술마을조성,무엇을 담아야 하나
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폐교에 홍성군립미술관 건립 가능할까?
자원봉사로 행복한 삶과 희망을 함께 나눠요
홍성의 친환경 축산의 미래, 유기축산에서 답을 찾다
2017년 기획취재
가축분뇨, 축산악취, 해결방법은 없을까?
위기의 작은학교 특성화로 되살리자
자유학기제 시행 1년, 아이들이 행복한 진로교육
건강한 마을공동체 만들기, 왜 어린이도서관인가?
가업을 잇는 청년, 청년CEO, ‘농촌에서 삶의 가치를 찾다’
일제시대 아시아 최대 석면광산 충남, 안전지대일까?
지명역사 1000년 자치단체,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용도 폐기된 공공건축물의 재활용 방안
전통발효식품, 농업농촌 신혁신 모델 되다
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2018년 기획취재
농촌의 빈집에서 도시재생의 길을 찾다
폐교위기 농어촌 작은학교에서 희망을 찾다
충청권 지진 안전지대 아니다!
도시청년들, 귀농·귀촌의 꿈을 실현하다
당신의 자소서
다 함께 홍성사람-다문화가족 만세
로컬뉴스 활용을 통한 독자마케팅 활성화
역사자료로 살펴보는 수룡동 마을
삶과 기억의 편린
순간포착 미디어속으로
2019년 기획취재
천년 역사문화유산 홍주성의 부활
충남의 문화재 재발견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헌책방에서 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길을 묻다
마을의 역사문화·공동체의 삶을 읽다
충남의 자연유산 마을 숲, 미세먼지시대 공동체의 삶과 생명의 공간이다
이주노동자 '그들'이 아닌 '우리'다
미디어를 통한 마을 공동체 회복을 꿈꾸다
2020년 기획취재
'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100경
천년역사도시, 홍성도심재생 젊은 문화도시가 답이다
풀뿌리미디어 마을신문, 동네를 바꾼다
홍성군 청사이전, 균형발전 기회인가? 위기인가?
농어촌 빈집·폐건물, 공유경제 가치를 담다
천년의 역사를 담은 땅,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를 묻다
화가 전만성의 길따라 마음따라
2021년 기획취재
도심속 자연하천, 생명과 문화가 흐른다
지역문학관 활성화 방안을 찾다
충남혁신도시, 테마·스토리 입혀야 사람이 몰린다
전통시장 활성화, 그곳엔 삶과 문화가 흐른다
도심 생태하천 복원, 주민들의 행복공간 복원이다
혁신도시, 현장에서 미래의 길을 묻다
2022년 기획취재
전통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다, 100년 가업을 잇는 사람들
폐건물·폐산업시설, 문화재생 가치를 담다
생태경관 농업유산, 다랑이논을 보존하자
사라지는 원도심 근대문화유산, 어떻게 보존·관리할까
농촌지역 폐교의 재발견, 문화예술이 꽃피다
국가숲길에서 내포문화숲길의 역사와 문화를 묻다
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희망마을공동체 스토리
충청·홍주의병 발상지 홍주
2023년 기획취재
고치고, 바꾸고, 새롭게 캠페인
홍성 원도심 활성화, 특화거리에서 답을 찾다
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국내 최대 석면피해지역 충남, ‘석면피해기록관’을 세우자
충남도청신도시 주변마을 문화유산
고향사랑기부제, 일본은 어떻게 성공했나?
100년 정미소·양조장에 문화예술이 꽃피다
2024년 기획취재
1894~2024 동학 130년, 충남동학혁명 현장을 가다
충청의 재발견, 100년 술도가 전통의 향기를 빚다
자치행정
전체
홍성군
홍성군의회
예산군
예산군의회
충남도
충남도의회
정치
전체
정치일반
국회·정당
농업
전체
농업일반
기관·단체
강소농·강소기업
홍성농업의 미래를 말하다
농촌의 힘, 홍성의 발전을 꾀하다
경제
전체
경제일반
기업
금융
부동산
사회
전체
사회일반
사건·사고
검찰·법원
호국·보훈
복지
의료·보건
출산·육아
환경
교통
여성
다문화
장애인
궂긴소식
예식·피로연
인사
새의자
종교
나눔현장
교육
전체
교육일반
철이삼촌의 쉼터이야기
동아리 탐방
작은 학교가 농촌의 희망이다
문화
전체
문화일반
방송·미디어
행사·축제
공연·전시
공모·대회
책
영화
레저·관광
여행
문화재
역사·인물
스포츠
전체
스포츠 일반
동호회
행사·축제
대회 소식
대회 결과
사람들
전체
내 고향은 홍성, 출향인
홍주人홍주in
홍성에 살다
전체
곤충이야기
기관·단체
마을신문
마을에서 만난 사람
마음을 전해요
맛집멋집
미디어속으로
야생화 이야기
어르신들의 이야기 그림
이웃이야기
우리마을 이장
이장스피커
사람 사는 세상 홍성
사람이 희망이다
생활건강상식365
생활상식
신설상가
천년홍주길을 걷다
JOB(잡)스러운 수다생활
청춘불패
홍성, 색으로 물들다
할머니기자단
홍성별의별농장
행복해지는 그림그리기
충남내포혁신도시
선거
전체
2024 4·10 제22대 국회의원선거
2023 3·8 제3회 전국동시조합장선거
2022 6·1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22 3·9 제20대 대통령선거
2020 4·15 제21대 국회의원선거
2019 3·13 제2회 전국동시조합장선거
2018 6·13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7 5·9 제19대 대통령선거
2016 4·13 제20대 국회의원선거
2015 3·11 제1회 전국동시조합장선거
2014 6·4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2 4·11 제19대 국회의원선거
2012 12·19 제18대 대통령선거
2010 6·2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08 4·9 제18대 국회의원선거
2007 12·19 제17대 대통령선거
공명선거캠페인
후보공약점검
이슈&이슈
전체
데이터로 바라본 홍성
황기자의 지역현안 브리핑
코로나19
홍주일보
전체
사고
사령
만평
공동체 캠페인
환경보호실천 캠페인
포토뉴스
전체
포토
동영상
-
-
시작페이지
즐겨찾기
UPDATED. 2024-05-13 19:25 (월)
처음으로
로그인
회원가입
전체기사
RSS
검색
기사검색
검색
상세검색
×
전체보기
뉴스
자치행정
정치
농업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스포츠
충남내포혁신도시
오피니언
칼럼
독자기고
사설
기획특집
사람들
홍주人홍주in
내 고향은 홍성, 출향인
이웃이야기
마을신문
기관·단체
홍성에 살다
공동체 캠페인
생활상식
열린광장
자유게시판
공지사항
구독신청
광고문의
기사제보
후원안내
홍주일보홍주방송
2023 계묘년 정월대보름 한마당 달집태우기
희망마을공동체 스토리 - 홍북의 빛
닉네임
비밀번호
제목
게시물 옵션
비밀글로 설정
자동등록방지
내용
경복궁(景福宮) 북원(北苑:경농재(慶農齋),경무대(景武臺),오운각(五雲閣) 권역) 원형 복원 http://blog.naver.com/msk7613 문화재청은 조선국(1393-1897) 도읍 한성(漢城)의 북쪽에 창건한 북궐(北闕) 경복궁(景福宮)의 어원(御園) 북원(北苑:서편의 경농재(慶農齋), 동편의 경무대(景武臺), 북편의 오운각(五雲閣) 권역)과 궐외각사(闕外閣司) 터를 고도(古都) 특별보존지구 및 사적(史蹟)으로 지정하고 100년 이상의 문화재 복원 대상을 우선 순위를 정하여 원형 복원하여야 한다. 옛 도읍 터 고도(古都)·옛 궁궐 터 고궁(古宮)· 궁장(宮墻) 밖 관청 터 궐외각사(闕外閣司) ·조개무덤·고인돌·선 돌·옛 무덤 ·굴집, 제단(祭壇) 터·관아(官衙) 터·옛 절 터·사고(史庫) 터· 성균관(成均館) 터· 4학(四學) 터· 서원(書院) 터 ·향교(鄕校) 터·사우(祠宇) 터, 성곽(城郭) ·성(城) 터·관문(關門) 터·봉수대(烽燧臺)·옛 전적지(戰跡地)·수영(水營) 병영(兵營) 터, 옛 길·뚝·제언(堤堰)·가마 터·시장(市場) 터·교지(橋址)·석표(石標), 원지(苑池)·옛 집터·어원(御園)·정천(井泉)이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한 사적(史蹟) 지정 대상이다. 경복궁(景福宮)의 역사문화경관에 반하는 현대 건축물, 시설물의 신축(新築)·증축(增築)·개축(改築)을 금지, 2층 · 10m 이하로 건물(建物)의 층고(層高)를 제한하고 택지(宅地) 조성이나 토지의 개간(開墾) 또는 형질 변경, 수목 심기 및 나무 베기 또는 토석류의 캐기, 도로의 신설 및 확장·포장 등을 제한하여 경복궁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亭), 문(門), 교(橋),어원(御園),궐내각사,궐외각사의 역사적 문화경관을 원형복원하고 광화문(光化門),건춘문(建春門),영추문(迎秋門) 앞 궐외각사(闕外閣司), 북원(北苑) 권역의 현대 건축물, 시설물을 철거,이전하고 경복궁 중건을 완료한 조선시대,대한제국시대를 기준으로 원형 복원하여야 한다. 대한국 태조(太祖) 고황제는 1395년 조선국(1393-1897)의 법궁(法宮) 경복궁(景福宮)을 창건(創建)하여 건춘문(建春門),영추문(迎秋門),신무문(神武門),광화문(光化門)과 동십자각,서십자각을 잇는 궁장(宮墻)을 축조하였고 ‘경복(景福)’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국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太平聖代)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이다. 세종(世宗)은 1426년 경복궁의 어원(御園)을 조성하는데 녹원(鹿苑),향원정(香遠亭),관저전(關雎殿),충순당(忠順堂),서현정(序賢亭),취로정(翠露亭)이 있고 신무문 밖에 임금이 공신(功臣)들과 산 짐승을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그 피를 서로 나누어 마시며 단결을 맹세하던 의식인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는 회맹단(會盟壇),태백성(太白星)에게 제사지내던 제성단(祭星壇)이 있었다. 고조 광무제 대의 어원(御園) 북원(北苑)은 1868년,1893년에 신축하였으며 서편의 경농재(慶農齋), 동편의 경무대(景武臺),북편의 오운각(五雲閣) 권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명성황후 시신이 암매장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오운각(五雲閣), 1칸 규모의 정자 옥련정(玉蓮亭),남송(南宋) 연릉(延陵 ) 오거(吳据)의 글씨를 집자(集子)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각자 바위, 벽화실(碧華室),침류각(枕流閣), 여덟 배미의 논을 만들어 놓고 8도의 종자를 뿌려 친경(親耕)하며 8도의 풍농을 기원하는 경농재(慶農齋),군인들이 연습하는 중일각(中日閣),경농재 동편의 고조 광무제가 신하에게 칙지(勅旨)를 내린 대유헌(大有軒), 경농재 북편의 인원왕후 탄강지와 같은 이름의 양정재(養正齋), 경농재(慶農齋)의 부속 건물인 관풍루(觀豊樓), 경농재 서편의 지희실(至喜室),문과 시행하는 융문당(隆文堂), 제향(祭享) 전에 경무대(景武臺)로 나아가 서계(誓戒)를 받을 때 왕세자가 재숙(齋宿)한 춘안당(春安堂) 추안당(秋安堂),금위군(禁衛軍)의 수직소(守直所)인 수궁(守宮),무과 시행하는 융무당(隆武堂),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시행하는 경과(慶科),성균관 유생의 경서(經書) 강독 시험인 전강(殿講),응제시(應製試) 시행과 제향(祭享) 전에 서계(誓戒)를 받는 경무대(景武臺),비천당(丕闡堂)이 있으며 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였다.1875년 3월 19일 북원(北苑)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나서 참반 유생(參班 儒生)들에게 응제시(應製試)를 설행하였다. 국무총리 공관 터에 육영공원(育英公院) 학도들의 강론 시험인 응제시(應製試)를 시행한 태화궁(太和宮)이,청와대 사랑채 앞에 전차 종점이 있었고 1908년 일제 통감부(統監府)가 대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收奪)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총재 우사가와 카즈마사는 1910년 경복궁(景福宮) 전각,궐외각사(闕外閣司) 건물을 철거하여 기타이 등 일본인에게 강제 매각하였다.일제 총독부는 북원(北苑) 북편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실 청사를 신축하였다. 1395년 10월 7일 태조(太祖) 고황제가 전곡(錢穀)의 출납과 회계를 관장하던 삼사(三司)의 으뜸 벼슬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分付)하여 새 궁궐(宮闕)의 여러 전각(殿閣)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정도전(鄭道傳)이 경복궁에 대하여 말하였다.“신이 살펴보건대, 궁궐이란 것은 임금이 정사(政事)를 하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신민(臣民)들이 다 조성(造成)한 바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성을 보이게 하고, 그 명칭을 아름답게 하여 보고 감동되게 하여야 합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래로 궁전의 이름을 혹 그대로 하기도 하고, 혹은 개혁하였으나, 그 존엄성을 보이고 감상을 일으키게 한 뜻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 만에 도읍을 한성(漢城)에 정하여 먼저 태묘(太廟)를 세우고, 다음에 궁궐을 경영하시더니, 다음 해 을미일에는 친히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쓰시고 선대의 국왕과 왕후를 신묘(新廟)에서 제향을 올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새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셨으니, 대개 신(神)의 혜택을 넓히시고 뒷사람에게 복록(福祿)을 주심이옵니다. 술이 세 순배(巡杯)되어서, 신 정도전에게 분부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여 태묘(太廟)에 제향을 올리고 새 궁궐의 낙성을 고하게 되매, 가상하게 여겨 군신(群臣)에게 여기에서 잔치를 베푸노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 하셨으므로, 신이 분부를 받자와 삼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그러나 춘추(春秋)에,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 했으니, 어찌 임금이 된 자로 하여금 백성만 괴롭혀 자봉(自奉)하라는 것이겠습니까? 넓은 방에서 한가히 거처할 때에는 빈한(貧寒)한 선비를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되면 맑고 그늘진 것을 생각해 본 뒤에 거의 만백성의 봉양하는데 저버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말씀드립니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書經)의 유가(儒家)의 천하적 세계관에 의거한 정치철학 홍범 구주(洪範 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세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네가 군자와 벗하는 것을 보니 너의 얼굴을 상냥하고 부드럽게 하고, 잘못이 있을까 삼가하는구나. 너의 방에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구나.’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慶成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합니다. 성인이 만백성에게 인(仁)으로써 살리고 의(義)로써 만드시니,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므로 그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하므로, 동쪽의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여, 전하께서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 정령을 밝히게 한 것입니다.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자로서 누가 높고 영화로운 것을 바라고 위태로운 것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사랍답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 하고 좋지 못한 일을 꾀하여서 재앙(災殃)과 화난(禍難)으로 인한 실패 화패(禍敗)에 이르게 되는 것은, 진실로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稟達)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 일이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舜)임금, 우(禹)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히 쉬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떠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따라서 말하기를, ‘천하에서 나랏일로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혼자 비굴하게 노고를 하겠는가?’ 하며,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노리갯감으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술과 계집에 빠져 사람의 마땅한 도리(道理)를 돌아보지 않는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은 ‘이것이 나를 사랑함이 두텁다.’ 하여, 자연으로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으니, 신은 이로써 이름하기를 청하옵니다.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에 대해서 말하오면,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무(武)로써 난(亂)을 안정시킴이오니, 마치 사람의 두 팔이 있는 것과 같아서 하나라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예악과 문물이 빛나서 볼 만하고, 군병과 무비가 정연하게 갖추어지며, 사람을 쓴 데에 이르러서는 문장 도덕의 선비와 과감 용맹한 무부(武夫)들이 경외(京外)에 퍼져 있게 한다면, 이는 모두가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높이게 한 것이며, 거의 전하께서 문무를 함께 써서 오래도록 다스림을 이룰 것입니다.정문(正門)에 대해서 말하오면, 천자와 제후(諸侯)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윤하하신 뒤에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하였다.1396년 9월 15일 태조 고황제가 의장(儀仗)을 갖추고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하였다.1411년 7월 30일 3대 국왕 태종이 경복궁(景福宮) 안에 개천을 파라고 명하였다. 태종이 말하였다.“경복궁은 태조(太祖)가 창건하신 것이니, 마땅히 여기에 거처(居處)하는 자손에게 보여야 하겠는데, 상지관(相地官)이 말하기를, ‘명당(明堂)에 물이 없는 것이 흠(欠)이라.’ 하니, 개천을 개통하도록 하라.”8월 22일 공조 판서(工曹 判書)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하여 경복궁(景福宮)을 수리하게 하였다. 박자청에게 명하였다.“경복궁은 태조께서 세우신 것인데, 내가 만일 거처하지 않으면 자손들이 반드시 거처하지 않을 것이다. 경은 즉시 수리하라.”인하여 북루(北樓) 아래에 못을 파라고 명하고, 또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과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응(李膺)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다.9월 5일 경복궁(景福宮) 성 서쪽 모퉁이를 파고 명당(明堂) 물을 금천(禁川)으로 끌어들이라고 명하였다. 1412년 4월 2일 새로 큰 누각을 경복궁(景福宮) 서쪽 모퉁이에 지었다. 공조 판서(工曹 判書)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는데, 제도(制度)가 굉장하고 창활(敞豁)하였다. 또 못을 파서 사방으로 둘렀다. 궁궐의 서북쪽에 본래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태조(太祖)가 창건한 것이었다. 임금이 협착하다고 하여 명하여 고쳐 지은 것이다.4월 17일 경복궁(景福宮) 누각과 못에 거둥하여 두루 돌면서 살펴보고, 또 본궁 수각(水閣)에 거둥하여 상왕을 맞이하여 타구(打毬)하는 것을 구경하고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즐기었다. 사람을 시켜 또 못에서 고기를 잡게 하고, 창기(唱妓)에게 명하여 어부사(漁父詞)를 부르게 하였다. 상기(上妓)와 악공(樂工)에게 저화(楮貨) 1백여 장을 주었다.5월 15일 경복궁(景福宮) 누지(樓池)에 고기를 놓았다. 공조(工曹)·순금사(巡禁司)·군기감(軍器監)에 명하여 잡아서 넣었다.5월 16일 경복궁(景福宮) 새 누각의 이름을 경회루(慶會樓)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경회(景會)·납량(納涼)·승운(乘雲)·과학(跨鶴)·소선(召仙)·척진(滌塵)·기룡(騎龍) 등의 이름을 가지고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에게 보이며 말하였다.“내가 이 누각을 지은 것은 중국(中國) 사신에게 잔치하거나 위로하는 장소를 삼고자 한 것이다. 네가 가서 하윤에게 일러 이름을 정하여 아뢰어라.”김여지가 복명하는데, 경회루로 정하였다.1413년 2월 6일 행랑의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경복궁의 남쪽부터 태묘 앞까지 좌우 행랑(行廊)이 모두 8백 81간(間)이고, 또 태묘의 남로(南路)에 층루(層樓) 5간을 세웠다. 또 청운교(靑雲橋)의 서종루(西鍾樓) 2층 5간을 순금사(巡禁司)의 남쪽, 광통교(廣通橋)의 북쪽에 옮기고, 또 용산강(龍山江)에 새로 군자고(軍資庫)를 지으며, 서강(西江)에 새로 풍저창(豐儲倉)을 지으니, 역정(役丁)이 2천 1백 41명, 승군(僧軍)이 5백 명이었다. 전 판사(判事) 이간(李暕) 등 22인이 그 역사를 감독하고,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이 이직(李稷), 지의정부사 이응(李膺), 공조 판서 박자청(朴子靑) 등이 그 일을 영솔하였다.1416년 7월 3일 노루와 사슴을 경복궁(景福宮) 후원(後園)에서 길렀다. 광주 목사(廣州 牧使)에게 전지(傳旨)하여 재인(才人) 장선(張先)으로 하여금 그 무리를 거느리고, 생포(生捕)하여 바치게 한 것이었다. 1423년 4월 18일 사신이 흥천사(興天寺)를 구경하고 법당(法堂)에 들어가 세 번 절하여 예불(禮佛)하고, 사리각(舍利閣)에 나아가서도 세 번 절하였다. 높은 데 올라 경복궁(景福宮)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산세(山勢)나 물 흐름이 모두 음양(陰陽)의 이치에 맞으니 참으로 하늘을 만든 도읍이라.”하였다. 승려 60여 명이 가사(袈娑)를 입고 사신을 영송하니, 사신도 읍(揖)하여 예하였다.1426년 10월 26일 4대 국왕 세종이 집현전 수찬(修撰)에게 명하여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니, 근정전(勤政殿) 앞 둘째 문을 홍례(弘禮), 세째 문을 광화(光化)라 하고, 근정전(勤政殿) 동랑(東廊) 협문(夾門)을 일화(日華), 서쪽 문을 월화(月華)라 하고, 궁성(宮城) 동쪽을 건춘(建春), 서쪽을 영추(迎秋)라 하고, 근정문(勤政門) 앞 석교(石橋)를 영제(永濟)라 하였다.1428년 1월 6일 병조에서 계하기를, “청컨대 경복궁(景福宮)의 주산(主山)과 좌비 산맥(左臂山脈)에 소나무를 심고 그 근방의 인가(人家)를 모두 옮기소서.”하니, 명하기를, “내년 봄에 소나무를 심고 인가(人家)는 금년 10월까지 옮기도록 하고, 또 집을 지을 땅을 주도록 하라.”하였다.1451년 4월 18일 풍수학(風水學)에서 아뢰기를,“경복궁(景福宮)은 백호(白虎)가 높고 험준하나, 청룡(靑龍)이 낮고 미약하므로 가각고(架閣庫) 북쪽 산의 내려온 맥(脈)에 소나무를 심어 길렀는데, 근년에 벌레가 먹어서 반이 넘게 말라 죽었으며, 그 마르지 않은 것도 근방의 무식한 무리가 가지와 줄기를 베어 쳤고, 혹 맥혈(脈穴)을 파고서 집을 짓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청룡이 날로 더욱 쇠약하여지니, 청컨대 표(標)를 세워서 한계를 정하고 소나무를 심어서 산맥을 비보(裨補)하게 하소서.”하니, 5대 국왕 문종이 예조(禮曹)와 한성부(漢城府)의 풍수학(風水學)에게 명하여 함께 살펴서 표를 세우게 하였다. 경복궁(景福宮)은 의례와 조회(朝會)를 하는 정전 근정전(勤政殿),국왕의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 사정전(思政殿),대전 강녕전(康寧殿),중궁전 교태전(交泰殿),동궁전 자선당(資善堂),세자가 학문 강학하는 비현각(丕顯閣),세자의 사무 공간인 계조당(繼照堂),대비전 자경전(慈慶殿),집현전(集賢殿) 수정전(修政殿), 칙사(勅使) 다례(茶禮), 경사에 연회를 베풀던 경회루(慶會樓),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시간을 측정한 흠경각(欽敬閣),고조 광무제가 친정을 한 건청궁(乾靑宮),외교사절 접견,고조 광무제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齋), 신정왕후가 승하(昇遐)한 흥복전(興福殿),창덕궁 경훈각(景薰閣)으로 이건된 내전 만경전(萬慶殿),전적, 서화를 수장한 집경당(集慶堂),국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선원전(璿源殿), 태조와 태종, 왕후의 위패를 모신 문소전(文昭殿),명성황후가 국무(國巫)에게 시켜 무의(巫儀)를 행한 내불당(內佛堂) 관월당(觀月堂),국왕 장례시 관을 모셔두는 빈전 태원전(泰元殿),명성황후의 신위(神位)를 모셔두는 혼전 문경전(文慶殿),국상시 사용한 회안전(會安殿)이 있다. 문무백관(文武百官)의 가장 높은 수상급(首相級) 관직인 3정승과 정2품 이상 고위관직자가 모여 중요한 안건을 협의한 빈청(賓廳),사헌부나 사간원의 벼슬아치들이 국왕에게 아뢸 일을 의논하던 대청(臺廳),이조(吏曹)나 병조(兵曹)의 전관(銓官)이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보던 정청(政廳)과 어명 출납(出納),관보 발행하는 승정원(承政院),실록(實錄)을 편찬하는 춘추관(春秋館),국정 자문,간쟁하는 홍문관(弘文館),문서 제술,사초(史草) 기록하는 예문관(藝文館),어제(御製)와 어필(御筆)을 보관하고 학술 연구하는 규장각(奎章閣),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檢書廳),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承文院),옥새와 마패를 관리한 상서원(尙瑞院),승정원(承政院)에서 결정된 일을 기별지(奇別紙)에 적어 알리는 기별청(奇別廳),국왕에 대한 시위(侍衛)와 전령(傳令)을 담당하는 선전관청(宣傳官廳),5위(五衛) 통솔하는 5위도총부(五衛都總府),국왕 학습,국사 논의 위한 경연(經筵)시행하는 경연청(經筵廳),국왕의 의복과 궁내의 재화(財貨)·금·보화 등을 관리하는 상의원(尙衣院),천문·지리·역수(曆數)·기상(氣象) 관측·물시계를 담당하는 관상감(觀象監),궁중(宮中)의 의약(醫藥)을 맡은 내의원(內醫院),궁중의 음식을 공급하는 사옹원(司甕院),내시들이 근무하는 내반원(內班院),연고(輦庫), 마랑(馬廊)을 관리하는 내사복시(內司僕寺)의 궐내각사(闕內閣司)가 있다. 궐외각사(闕外閣司)는 광화문(光化門),건춘문(建春門),영추문(迎秋門) 앞에 있었고 광화문(光化門) 앞에서 숭례문 앞까지 어려서 죽은 대군이나 왕자, 공주, 옹주들의 제사를 지내는 수진궁(壽進宮),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살았던 용동궁(龍洞宮),국정 총괄,관청 통제하고 의견 조율하는 의정부(議政府),도읍 한성(漢城)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漢城府),어명에 의한 고위 관료 수사 및 심판, 탄핵에 대한 판결하는 의금부(義禁府),관직 및 법령 서경, 관리 탄핵,감찰하는 사헌부(司憲府),직무 없는 당상관을 우대하기 위한 중추부(中樞府),군무를 통괄하던 3군부(三軍府),문관 인사,공신과 종친 관리하는 이조(吏曹)와 호구 파악,통계 기록,재정 출납하는 호조(戶曹),교육,외교와 문과 시행하는 예조(禮曹),무관 인사,무과 시행하는 병조(兵曹),법령 담당,상급 재판 심리하는 형조(刑曹),모임 인허가 및 평가,물품 관리,토목 공사를 담당한 공조(工曹),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퇴직 관리들이 국왕을 자문하는 기로소(耆老所), 궁중의 쌀, 베, 노비(奴婢)관리하는 내수사(內需司),외국어의 통역과 번역을 담당한 사역원(司譯院),가마 제작,말,목장(牧場) 관리를 관장한 사복시(司僕寺),노비(奴婢) 문서와 소송을 담당한 장예원(掌隷院),제사(祭祀)와 시호(諡號)를 맡은 봉상시(奉常寺),무기 제작을 담당한 군기시(軍器寺),사신 접대와 연향(宴享) 담당하는 예빈시(禮賓寺),감옥을 관장하는 전옥서(典獄署),의학교육과 의학취재(醫學取才)를 관장한 전의감(典醫監),백성의 죄를 다스리는 포도청(捕盜廳),야간 순찰을 담당한 순청(巡廳),대동미(大同米) ·대동포(大同布) ·대동전(大同錢)의 출납을 관장한 선혜청(宣惠廳)이 있다. 건춘문(建春門) 앞에 중학천(中學川)이 흐르고 의친왕의 친왕부(親王府)인 사동궁(寺洞宮:견지,관훈),대한국 황실 가례소 안동궁(安洞宮),순조의 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가 살던 죽동궁(竹洞宮;견지,관훈),관직 및 법령 서경, 간쟁하는 사간원(司諫院),황실 전적을 보관하는 규장각(奎章閣),도교의 초제를 주관하는 소격서(昭格署),국무(國巫)가 왕실의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기은(祈恩)을 관장한 성수청(星宿廳), 도교의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 3위(位)를 모신 삼청전(三淸殿), 공신(功臣)의 화상(畫像)과 동원비기(東園秘器)를 보관하던 장생전(長生殿),녹찬(錄撰)과 종실(宗室) 사무와 왕실 족보를 연구하는 종부시(宗簿寺),국왕의 계보,의복 관리, 어진 봉안한 종친부(宗親府),종친과 왕의 외척,왕실 외손을 예우하는 돈녕부(敦寧府),공신(功臣)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 충훈부(忠勳府),왕이나 왕세자의 사위 부마도위(駙馬都尉)가 속한 의빈부(儀賓府),태묘(太廟)를 관리하는 태묘서(太廟署),궁중의 정원·화초·과실 관리하는 장원서(掌苑署),총포(銃砲) 제작한 화기도감(火器都監), 기기국(機器局)의 무기고인 번사창(飜莎廠),원포(園圃)와 소채(蔬菜) 관리를 관장한 사포서(司圃署),회화를 관장하는 도화서(圖畵署),시전(市廛) 감독하는 평시서(平市署),우유(牛乳) 공급하는 타락색(駝酪色),서양식 근대 의료 기관인 광혜원(廣惠院)이 있다. 영추문(迎秋門) 앞에 백운동천(白雲洞川), 옥류동천(玉流洞川)이 흐르고 인목대비가 폐출되어 승하한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조선국 국왕을 생산한 후궁의 사당 사친묘(私親廟) 6궁(六宮),선조의 잠저(潛邸) 도정궁(都正宮),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이 여승으로 거처하는 자수궁(慈壽宮),태종과 세종의 잠저(潛邸) 장동궁(壯洞宮),영조의 잠저(潛邸) 창의궁(彰義宮),인조(仁祖)의 잠저(潛邸)인 어의궁(於義宮),수라상(水刺床) 감독,어명 전달,궐문 수직(守直)을 담당한 내시부(內侍府),사직단(社稷壇)을 관리하는 사직서(社稷署),선공감(繕工監)의 분사(分司)인 분선공감(分繕工監),전시에 어명을 받아 장병을 지휘한 체찰사부(體察使府:체부청),궁중의 생선,고기,소금,땔나무,숯을 조달한 사재감(司宰監),쌀·국수·술·간장·기름·꿀·채소·과일 공급,직조(織造),내연(內宴)을 담당한 내자시(內資寺)가, 한성(漢城) 4대문 밖에 병든 사람을 구호하고 치료한 활인서(活人署),제향(祭享) 및 발인 때까지 국왕,왕후의 관을 모시는 빈전(殯殿),수라간에서 쓸 얼음을 관리한 빙고(氷庫),제례에 쓸 희생(犧牲)을 기르는 전생서(典牲署), 시신(屍身)을 넣는 속 널과 겉 널 관곽(棺槨)의 제조, 장례(葬禮)를 관장한 귀후서(歸厚署),종이를 제조한 조지서(造紙署),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가 집무한 경기감영(京畿監營)이 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