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상태바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 범상(정암사 총무스님)
  • 승인 2010.08.06 15:47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너나들이 칼럼]

범상 스님(오서산 정암사)
우리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조국과 민족의 입장을 고수하면 '좌파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만큼 우리 스스로 우리역사에 대해서 무관심 하고 보편적지식의 기준이 되는 교과서가 왜곡되어 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역사는 츠다 쇼우키치(津田左右吉)와 함께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기위해 한국고대사를 왜곡하며 식민사학을 주도했던 이마니시류(今西龍)의 제자이자 친일역사학자 이병도의 입장에 기초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병도는 일제가 우리민족에게 식민사학을 주입하기 위해서 대표적인 친일파 이완용ㆍ박영효를 고문으로 내세워 만든 친일어용 역사단체인 '조선사편찬위원회(이후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보(연구원)를 지냈다. 해방 후에도 '조선사편수회'를 존속시켜 나갔으며 '국사교본'을 편찬하여 중등교과용으로 사용하게 했고, 임시교원양성소를 구성하여 국어와 국사 중등교원 양성했다

이병도가 양성한 역사학자와 교원들은 학계와 학교에서 기득권을 선점하였고 그들은 자신들의 학맥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식민사학의 논리에 기초한 역사관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이병도의 손자인 이장무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낸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울대 총장이 되었으며, 이장무의 동생 이건무는 문화재청 청장으로 재임 중에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 같은 현상은 과거 100여 년간 역사뿐만 아니라 정치ㆍ경제ㆍ종교 등 사회전반에 걸쳐서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동학혁명󰡑과 일본의 폭정에 맞섰던 '명천농민저항' 등이 있었으나 해방이후 이렇다 할 민중저항이 없었다고 본다. 동학혁명당시 사회기득권세력으로서 민중들을 착취하던 양반들은 겉으로는 불충(不忠)한 역도들을 토벌 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실재로는 자신들(개인과 붕당)의 영달을 위해 외세인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결국 동학혁명은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서 1년 동안 30~40만 명이라는 미증유의 희생자를 남기고 수포로 돌아갔으며, 이후 일본을 뒤에 업은 친일파들은 득세하였고 해방 이후 친미를 자처하여 지금껏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해방은 미국과 연합군의 승리 덕분이라는 공식을 만들면서 우리민중들의 항일독립운동을 축소시켜 버렸다.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의 무조건항복이 해방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루스 커밍스'의 지적처럼 군사학적으로 보면 일본의 주력부대인 관동군이 만주에서 대한독립군과 중국과 소련군에 의해서 발이 묶였고, 특히 일본 본토와 중국대륙을 연결하는 동만주 땅에서의 조선민중과 중국민중의 항일투쟁은 일본의 대륙침략에 대해 심대한 차질을 안겨주면서 일본이 만신창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해방공간에서의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보면 미국은 조선민중이 생각 했던 것처럼 해방군이 아니라 일본에게 조선이라는 식민지를 인수받으러온 또 다른 침략군이었다는 사실이다.

소련붕괴이후 미국의 이라크침공에서 보듯이 미국의 패권주의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해방공간에서 미군을 해방군으로 착각하여 환영했던 조선민중의 어리석음이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이 이어져오는 서글픈 현실을 개탄하며 8.15해방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현미경 2010-08-11 23:24:17
동무의 당성을 아주 극찬하는 바요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