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에게도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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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에게도 이런 일이”
  • 주호창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11.23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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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던 황금 들녘이 사라지고 세찬 겨울의 찬바람이 불어 때 이른 소설의 함박눈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류시화 시인의 ‘길 위에서의 생각’이란 시가 떠오르는 계절이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어쩜 나는 후자의 경우로 울음의 폭포수가 밀려오는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게 됐다.

바로 한 달 전인 지난 10월 18일에 아내의 청천벽력 같은 췌장암 4기 판정은 갈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가슴 깊이에서 살을 오려내는 듯한 통증은 순식간에 목이 메어 찬양소리는 고사하고 잔잔한 목소리까지 울림이 없어졌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회한과 숨 가쁘게 일궈온 행복의 잔디밭에 무성한 잎을 피우지 못한 채 된서리에 낙엽 지는 청솔처럼….

하기야 인간은 신 앞에 단독자로 혼자 태어나서 부부로 함께 살다가 언젠가는 서로 이별을 고해야 되는 운명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황급히 종착역을 향할 줄이야.

생자필멸(生者必滅)로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내 차례가 되리라 생각조차 못 했는데….

흔히들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나를 위한 예언이었나.

물론 노년부부가 동시에 죽을 수는 없다. 누군가가 먼저 죽게 돼서 혼자 사는 연습을 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우리 주변에 아니 우리 마을에도 홀로 사는 분들이 의외로 많아서 함께하는 우리 부부는 행복의 나래를 펴며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도 있었다.

이제 머지않은 날에 우리도 그 대열에 동참하게 될 것 같은 마음에 희비가 엇갈리는 지점에서 앞으로 걸어가야 할 가시밭길에 두려움이 밀려온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있겠으며, 그 어떤 기쁨이 이 슬픔을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

“화가는 일생동안 화면에 그림을 그리고 스승은 칠판에 글씨를 쓰고 부부는 삶에 인생을 쓴다”라는 말이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요 동고동락하는 운명의 공동체라 했는데 한 쪽 날개를 잃은 새처럼 저 높은 창공을 어찌 외롭게 날 수 있겠는가.

인생 마라톤 경기에서도 마지막 결승점이 중요하고 야구의 9회 말에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죽을 때까지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자위하며 비록 항암조차 할 수 없어 손을 놓고 그날만을 기다리는 심정에서 어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은 부질없는 공상일까!

한 달 동안 한 병실에서 지난 50년을 반추하노라니 후회와 잘못 살아온 나날들이 얼룩진 자화상으로 그려진다.

유명한 극작가인 버나드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말이 가슴에 메아리친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문자답해 본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은 한 많고 고통 많은 이 세상에서 근심 걱정 없는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잠들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별의 환송곡을 불러야 하겠다.

아직은 병석에서 적은 양의 식사와 영양제 주사로 연명하며 자녀 손들의 문병과 전화로 그간 못다 한 그리고 앞으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하루를 그곳을 향해 걷는 아내의 모습을 눈시울 너머로 훔쳐보면서….


주호창 <광천노인대학장, 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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