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에 최선 다하고 ‘신뢰’ 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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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최선 다하고 ‘신뢰’ 중시한다
  • 전만수 본지 자문위원장
  • 승인 2012.02.1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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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만수의 인물프리즘 삶 & 꿈 - ③이국범(李國範) 예비역소장

 


맹추위가 입춘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 매섭게 몰아치던 날, 서초동의 지하철 인근 커피숍에서 짬을 내었다. 가죽 점퍼차림의 옷매무새도 그렇지만 짧고 단정한 두발, 반듯한 자세며 표정에서 그는 천상 군인이었다.
커피와 안부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가 최근 새누리당이 발표한 사병월급 문제부터 시작되었다.

최근 한나라당(새누리당)에서 사병월급을 40만원으로 올린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빅토리아 여왕 재임 60여년의 기간이 영국 역사상 가장 번영된 시기였다. 그 이후 영국은 2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극심한 경제침체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마거리트 대처 수상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고질적이었던 영국병을 치유하고 영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upgrade)시켰다. 장기간 경기침체의 주범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문제였다. 우리나라도 그런 역사의 암울한 시기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재정운용이 선심성, 퍼주기 사업에 우선 배정되면 계속사업은 불가피하게 줄여야 하는 데 그 계속사업 예산이 중요치 않다고 평가할 수 있겠나? 걱정이다” 군 복지를 위한 사병월급의 인상에 국한된 문제라기보다는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경쟁적으로 포퓰리즘적 정책남발에 대한 포괄적 우려다.

요즘 집중하고 있는 일은?
“군인이면서도 지금까지 주로 해왔던 일이 국방력 증강을 위한 무기개발, 구매 쪽에 종사해 왔다.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는 ADD(국방과학 연구원)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방위산업관련 중소기업의 자문역할도 하고 있다. 시간적 구속은 없어 자유롭지만 매우 바쁘다. 책에서 보니 인생을 24시간의 시각단위로 재단했을 때 60대의 나이는 18시에 해당된다고 한다. 아직 그냥 쉬기엔 너무 이른 나이다. 활동할 수 있는 한 사회에 참여하여 작은 역할이라도 할 생각이다”

퇴역하시기 전까지 하신 주요 업무는?
“2006년 방위산업청이 개청하면서 사업관리본부장 보직을 맡아 330억에 달하는 국방사업(구매, 개발)을 총괄하였다. 2007년 12월 전역과 동시에 방사청 한국형 헬기사업단(KHP)단장을 맡아 3년 임기를 채우고 2010년 12월에 퇴직하였다. KHP사업은 금년 6월 완료 시점을 앞두고 있는 데 순항중이다. 작년 에어쇼에서 선을 보였는데 ‘놀랍다’는 반응 이었다.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빈 라덴 작전에 투입되었던 미군 헬기와 성능에서 어떤 차별성이 있는가?
“우선 상당한 수입대체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물론 미군헬기가 기계적으로 우위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날로그 방식인데 반하여 우리 것은 디지털 시스템이다. 예를 들면 3차원의 네비게이션이 장착되어 있어서 어떠한 악조건상황 에서도 운항할 수 있다. 성능에서 우월성을 자부한다”
‘한국형 헬기’사업에 대한 애정과 대단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군인의 길을 선택한 동기는?
“전적으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초등학교시절 공무원이시던 부친이 사업에 손을 대어 실패하셨다. 중학생이 되면서 어린마음에 대학은 가야 하는 데 돈 안들이고 가는 방법을 생각하다보니 사관학교를 꿈꾸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군사관학교를 생각했었는데 당시 대학생이던 사촌형이 육사를 제의하였다. 중2때부터 고3까지 사관학교 위주로 공부를 했다”
이 장군은 육사 30기(1970년)로 입학 2007년 전역할 때까지 38년간 군인의 길을 걸어왔다. 육사동기인 이기목 장군과 인흥식 대령은 고등학교 1년 선배들이다.

계기야 어찌됐든 장군이 되었고 별 두개(2 star)를 달았으니 가문의 영광이 아닌가?
“사람의 욕심은 한도 없겠지만 그런 위치까지 오르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허허…아마 용봉산(龍鳳山)의 정기를 받은 것 같다. 그러나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군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이나 사건은?
“유난히 변화하는 시점, 달라지는 조직 과정에 참여해왔다. 예를 들면 수십 년 써오던 대포가 대대장 시절에 바뀌었다. 52사단장시절에는 수도군단 창설을 맞았고 육본 무기체계사업단의 창설 단장, KHP 창설단장 등을 맡아왔다. 조직의 변화에 응전하여 다행히 큰 실패는 없었다. 그런 평가가 장군이 되고 무사히 전역을 하고 또 연장선상에서 같은 일을 해오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1986~7년 인제 원통에서 대대장을 할 때의 일이 기억된다. 대대병력 400여명의 사병 인사카드를 일일이 점검하여 홍성출신 사병들을 ‘찜’해두었다가 포상휴가를 보내준 적이 있다. 그 사람들은 지금도 모르고 있을 게다. 당시에는 그 정도의 재량은 있었다”
즐겁고 유쾌한 고향사랑 추억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뢰라고 생각한다.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충청도인의 장점이기도 한 것 같다. 살다보니 우리사회는 약삭빠르게 활동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알량한 이득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안타깝다”

싫어하는 것은?
“조직생활을 하다보면 아첨을 과도하게 한다거나 신뢰를 주지 못하는 언행을 일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인생의 좌우명은?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 결과 보다는 과정에 최선을 다한다. 부하들과 생활하면서도 결과가 신통치 않아도 과정에 최선을 다한 사람을 평가하려고 노력했다”
군인의 단호함과 절도가 녹아 있다.

제2의 인생설계는?
“아직 현업을 떠나서의 계획은 없다. 아직 10여년은 뭔가 사회적 활동을 지속할 생각이다” 국방과 방위산업 전문가로서의 국가를 위해 할 사명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서두에 언급하셨듯이 숨 가쁘게 달려왔는데 살아온 인생을 가볍게 되돌아본다면?
“결코 편안하게 오지 못했다. 치열하게 살아왔다. 긴장의 연속 이었다. 습관화 되다보니 지금도 릴렉스(relex)가 잘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잃은 부분도 많다. 부모님께 효도할 기회도 잃어 버렸고 방방곡곡 옮겨 다니다보니 고향친구도 잊고 살 수밖에 없었다. 아예 잊고 살았다는 표현이 옳을 게다. 늘 미안하고 빚진 마음으로 살고 있다. 지금은 휴가도 당연시 되지만 과거에는 휴가도 마음대로 갈 수가 없었다. 장남이 제사에 제대로 참석해 본적이 없다”
평생을 옥죄어온 업보의 고백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사적인 영역이라기보다는 당대 시골출신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일반적 상황이다.

인터뷰의 형식을 매듭 짓고 간만에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이 주로 자녀에 대한 내용이었다. 생각해 보니 걱정이란 틀 속에 자식자랑이 흠뻑 녹아 있었다. 자식농사를 잘 지은 이국범 장군 그도 역시 평범한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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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범(李國範) 예비역 육군소장은 홍북면 대동리 35번지에서 아버지 이계우(92 작고)와 어머니 한향순(07 작고)의 1남 5녀 중 장남으로 1951년에 태어났다. 홍북초 (27회), 홍성중(16), 홍성고(24회)와 육군사관학교(30기)를 졸업하였으며 전남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육본 전력계획처장, 전력단장, 52사단장(소장), 국방부획득정책국장, 방위사업청 사업관리 본부장, 한국형헬기사업단(khp)단장 등을 엮임 하였다. 1977년 중위시절 동갑내기 간호장교이던 아내 최순자와 결혼하여 슬하에 2녀 1남을 두었다. 장녀 이재연(34)은 결혼했으며 둘째딸 이재하(32)는 파리 종합예술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예술가로 활동 중이다. 아들 이재형(28)은 군 제대 후 텍사스주립대에 ROTC로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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