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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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마이 라이프!
  • 김옥선 칼럼위원
  • 승인 2020.02.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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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면의 한 마을을 조사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이 씨는 1940년생으로 예산군에서 시집 왔다. 시집오니 남편은 일을 해서 집안 형편을 늘려가기보다 책을 읽거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시댁에서 가지고 있는 땅이라고는 중종산이 전부였다. 이 씨는 그 땅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쳐서 길렀다. 남의 집에 일을 하러 다니기도 했다. 자식들이 커 가면서 교육비를 대기에는 빠듯했다. 이 씨는 지인의 소개로 화장품 판매를 시작했다. 커다란 화장품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녔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1980~90년대 무렵이었던 것 같다. 화장품 가방을 들고 판매를 하는 방문판매원이 동네 곳곳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화장품 방문판매원이 화장품 산업에 얼마나 많은 산업적 기여를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가정주부들이 열심히만 하면 적잖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녀 저녁이면 퉁퉁 부은 다리와 허기를 안고 돌아오지만 그렇게 얻어진 돈으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는 자부심만은 대단하다.

이 씨 역시 화장품 방문판매원을 하며 벌은 돈으로 자식 두 명 대학공부를 시켰다. 남편의 경제적 활동에 의지하거나 그 탓을 하기보다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 것이다.

지금 와서 내 인생을 이렇게 보면 말이여, 나 참 멋있게 살았다, 그런 생각이 들어. 나 옛날에는 힘도 좋았어. 나무도 봇짐해서 번쩍번쩍 해서 나르고, 쌀 한 가마도 거뜬히 들었어. 지금은 요렇게 꼬부라져서 암 것도 못허지만.”

또 다른 부녀자도 만났다. 김 씨는 1941년생으로 결혼 후 남편의 과음과 폭행에 시달렸다. 결국 남편은 과도한 음주로 인해 사망했고, 김 씨는 남은 자식들과 살기 위해 보따리장사를 했다. 집에서 만든 두부, 콩나물, 떡 등을 머리에 이고 고개를 넘어 다니며 팔았다. 2년 전 무릎 수술을 하기 직전까지도 보따리장사를 했다.

우리 아들이 얼매나 효자인지 몰러. 이 집 땅이 국유지여서 매년 세금을 냈었는데 얼마 전 아들이 샀어. 지금은 다 좋아유. 우리 집 마당에 감을 먹고 씨를 심었는데 그게 자라서 작년에 감을 250개나 땄어. 내가 세 봤지.”

김 씨의 얼굴에는 지나간 험한 세월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렵고 힘든 시절을 통과해 온 수많은 부녀자들의 삶을 접하는 순간이었다. 문득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해 저문 어느 오후/집으로 향한 걸음 뒤엔/서툴게 살아 왔던/후회로 가득한 지난 날/그리 좋지는 않지만/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석양도 없는 저녁/내일 하루도 흐리겠지/힘든 일도 있지/드넓은 세상 살다보면/하지만 앞으로 나가/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브라보 브라보/마이 라이프 나의 인생아/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찬란한 우리 미래를 위해/내일은 더 낫겠지/그런 작은 희망 하나로/사랑할 수 있다면/힘든 일 년도 버틸거야/일어나 앞으로 나가/니가 가는 곳이 길이다

마을 고샅을 돌아오면서 차에서 내려 마을 쪽을 바라봤다. 마을 입구 소나무가 바람을 따라 멋들어지게 기울어져 있다. 소나무 사이로 분필을 뭉게 놓은 듯한 구름 한 자락이 소리 없이 지나간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인생이, 삶이, 그 어디쯤에 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을 살아갈 뿐이다. 단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허리가 꼬부라져 아무 힘도 못 쓸 그런 나이가 되었을 때 나 참 멋지게 살았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그야말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일 것이다.

 

김옥선<홍성군마을만들기지원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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