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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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는 낙화암 -32
  • 한지윤
  • 승인 2020.03.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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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달은 새 무명옷으로 갈아입고 보퉁이를 든 채 혜법스님 앞에 꿇어 앉았다.
“법사님께서는 왜 이 불쌍한 자를 버리려 하시나이까…… 사실 당장 나가라니 도무지 어떻게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올 때는 그래도 노화를 구출해야 되겠다는 결심이라도 있었지만, 이것도 저것도 단념한 그인지라 이제와서는 암자 밖이 바로 죽음의 구렁같았다.
“네가 삼 년 동안 일념으로 쌓은 공덕의 보람이 있어서 이제는 나와의 인연이 끊어졌다. 오늘 안으로 암자를 떠나거라.”
혜법 스님의 음성은 마치 심판자의 선고처럼 엄숙하기만 했다.
“다만 네 삼 년 동안의 공덕에 의해 내가 세 개의 구슬을 주마. 이 구슬로 너의 남은 액운을 씻도록 해라.”
하고 말하며 혜법스님이 주는 걸 받아 보니 ‘세 개의 구슬’이란 곧 ‘세알의 잣’이었다.
“앞으로 일 년 동안의 앞 길에 세 번의 액운이 닥칠 것이니 그 때마다 이 잣 한 알씩을 깨물어라.”
“네, 알겠사옵니다.”
그제야 용기를 얻은 지달은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다.
“옷만 가지고 가면 배가 고프지 않느냐?”
그러면서 스님은 승방 벽장 속에서 무언가를 한웅큼 싸 주셨다.
사실은 누룽지가 아니라 쌀을 삶아 말린 쌀이었다.
스님은 그 삶은 쌀을 베주머니에 한웅큼 넣어선 보퉁이 속에 끼워 주셨다.
지달은 스님의 세심한 자애에 눈물을 흘리며 하직을 고했다.
암자를 나온 지달은 보퉁이를 둘러메고 길가 굵직한 묵은 칡넝쿨을 부러뜨려 지팡이를 하나 만들어 정처 없는 길을 떠나 걷기 시작했다.

암자를 떠나 십여 리를 걸은 후, 지달은 길가 나무등걸에 기대서서 잠깐 쉬기도 했다.
가도 가도 산길인데, 도대체 어디로 갈까도 좀 생각해 봐야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는데 돌연 지달이 선 나무등걸 뒤에서 사람의 신음소리같은게 들려왔다.
“!……”
지달은 이상한 소리에 바짝 긴장하고 귀를 세웠다.
“으으응……”
분명히 사람의 신음소리였다.
지달은 칡지팡이를 꼭 쥐고 소리 나는 곳으로 살금살금 기어서 그곳으로 갔다.
“아……”
몇 걸음 가다가 지달은 그만 무의식적으로 외치며 우뚝 멈춰서 버렸다.
묵은 띠풀 속에 한 여인이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지달은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갔다.
맥을 짚어 보니 아직 살아 있었다. 지달은 곧 근처 시내로 달려 가서 손으로 물을 떠 와 여인의 입술에 묻히며 한 모금을 먹였다.
물이 입에 들어가자 여인은 한 두 번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지달은 신기해서 자꾸 손으로 물을 떠 와 입술에 묻혀 주고 한 모금씩 먹여주었다.
여인이 입맛을 자꾸 다시는 걸 보고선
“옳지! 배가 고픈 모양이군, 가엾게도 3년 전의 내 신세와 똑같군.”
그리고는 보퉁이 속에서 아까 스님이 준 ‘삶은 쌀’을 내어 한 알을 넣어 주었다.
한 알, 두 알, 세 알이 들어가자 여인은 점점 기운을 차린 듯 하였다.

한동안을 그렇게 하자 그 여인은 벌썩 일어나 앉았다.
그 동작이 어떻게 당돌하던지 지달은 흠칫 놀랐다.
쌀알 세 알로 어떻게 그리 쉽게도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지달은 혜법스님의 신통력을 정말로 놀랍게 느꼈다.
“아이구, 여기가 어디에요?”
일어나 앉은 여인이 열띤 눈으로 지달을 바라보자, 지달은 그만 정신이 아찔해졌다.
“저……저…… 당신은 행여……”
그러다가 정신 나간 사람 모양으로 빤히 얼굴만 쳐다봤다.
여인도 어느새 눈을 크게 뜨고 지달을 훑어보고 있었다.
“당신은 저…… 저…… 노화……”
“지달님!”
노화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또다시 쓰러져 버렸다.
“흐흑……”
지달도 목이 메어 다시 말을 할 수 없었다.
‘노화를 여기서 만나다니……’
지달은 다시금 혜법스님의 천 리를 꿰뚫어 보는 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혜법 스님이 미리 알고 자기로 하여금 노화를 구하게 한것이리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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