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을 상기하며
상태바
‘민란’을 상기하며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03.12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란은 말 그대로 민중들의 반란이다. 부패한 관리, 통치권의 무능, 강자의 억압 따위로 이리 치이고 저리 떠밀리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찌질이 백성들이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막막한 지경에 내몰리게 될 때,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는 마지막 저항의 몸짓이다. ‘민란의 주인공들은 체제 수호를 위해 마련된 강력한 공권력과의 싸움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남아있는 약자들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산 제물로 바치는 장엄하고 눈물겨운 제전을 집전하는 것이다.

민란이 언제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중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주목할 만한 민란은 춘추시대인 기원전 841년에 일어난 국인(國人)의 난이다. 허신(許愼)이 지은 한자사전 설문(說文)’에는 ()’자를 네모난 성벽을 뜻하는 ()’자와 그 성벽 안을 나타내는 ()’자의 합성어로 풀이한다. 여기에서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을 국인(國人)’ 성벽 밖에 사는 사람들을 야인(野人)’이라 불렀다. 따라서 국인의 난이란 곧 왕궁(부근)에 사는 주나라 백성들의 반란이란 뜻이다. 그들은 잘못된 정치에 견디다 못해 낫, 괭이, 삽 따위의 농기구를 들고 왕궁으로 몰려가 희호(왕의 이름)를 죽여라!’를 외친 끝에 주나라의 열 번째 왕 여왕(勵王)을 몰아낸데 이어 그의 아들(태자)까지 죽이려 든다. 이에 놀란 제후 소공이 결국 태자 대신 자신의 아들을 내놓아 국민들을 달랜다. 민란치고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경우이다. 그 옛날에는 공권력이 강력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거의 모든 민란은 몇 년을 못 넘기고 한 달 이내에 진압되는 경우도 있다. 그 주인공들도 자살을 하거나 전란 중에 사망하거나 살아남았다 해도 결국은 끌려가서 사지가 찢겨 죽든지 끔찍하게 죽는다. 우리도 알 만한 중국의 역대 민란은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 말년에 일어난 진승 오광의 난부터 떠오른다. 이 난의 끝에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쟁패하여 항우는 오강에서 자결하고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다. 그 다음으로는 소설 삼국지에도 나오는 황건적의 난이다. 장각을 비롯한 장 씨 삼형제의 거센 반란을 진압하고자 조조, 원소, 원술, 공손찬, 손견, 유비 등이 임시로 연합한다. 다음으로 고운 최치운 선생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당나라 때의 황소의 난이다. 최치원이 쓴 토황소격문을 읽던 황소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의자에서 떨어졌다는 말이 전한다. 문약했던 송나라 때에는 소설 수호지의 주인공 송강을 비롯한 산동성 양산박의 호걸들이 일으킨 난이 있으나, 소설에서와는 달리 실제로는 그다지 파괴적인 민란은 아니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말기에는 홍건적의 민란이 맹위를 떨쳐, 그 새 조직 중 하나가 고려를 침공하여 개경까지 함락되자, 최영과 이성계의 맹활약으로 가까스로 나라를 구한다.

홍건적의 난에서도 드러났듯이 중세 후기로 오면서 민란의 주측은 종교단체였다. 불교나 도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지도자들이 민중의 불만을 대변하는 민란의 우두머리였다. 중국 민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여자가 총 두령인 경우가 몇 번 있었고, 대개의 여지도자는 미인이며 무술 따위도 뛰어나 사후에는 많은 전설을 낳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경우는 명나라의 가장 빛났던 치세인 영락제 시절에 난을 일으킨 당새아라는 여걸이다. 그녀는 14세기 말 산동성 빈주 시의 빈농출신이다. 어릴 때 부친에게 무술과 병법을 배워 15세 무렵엔 무예가 출중했다.(그녀의 고향은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뒤 아버지가 노역장으로 끌려가자 참지 못하고 남편(임삼)과 함께 관청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거기서 남편이 살해당하자 부친은 울분 끝에 사망하고 모친마저 중병으로 사망하니, 참다못해 14201월에 거사를 한다. 결국 토벌군에 진압 당했으나 그녀를 비롯한 지도자들을 체포하지 못하게 되자 영락제는 대노하여 당새아가 점령했던 지역의 고관들을 모두 처형했고, 그녀를 체포하기 위해 산동 일대의 비구니들과 도교의 여자 도사들을 모조리 북경(수도)으로 잡아와 조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는 전국에 걸쳐 그녀를 잡고자 했으나 허사했다. 뒷 날, 백성들은 그녀가 머물던 산채를 당새아채라 이름짓고, 반란군이 쓰던 맷돌, 돌절구 따위의 생활도구와 담장을 보존해온다고 한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숭정제를 자살케 한 이자성도 역사적으로 큰 획을 그은 민란의 지도자이다.

청나라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민란은 홍수전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이다. 본명이 홍인곤이었던 홍수전은 과거시험에 세 번 낙방을 한 뒤 중국인을 위한 기독교서 권세양언을 여러 차례 읽은 후 배상제교를 개창하고, 이름을 빼어나고 완전하다는 뜻의 수전으로 바꾸고 자신을 예수님의 동생이라며 포교한 끝에 광시성 일대를 장악하며 민란을 일으켰다. 그 파장은 손문, 모택동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민란의 삼거두 중 한 명이었던 남편 이문성이 죽자 반란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난민으로 가장하고 도망치라는 권유도 뿌리치고 칼을 들고 토벌군과 사흘간 혈전을 벌인 끝에 자살을 앞두고 한 맺힌 유언을 남긴 장 씨 부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정치가 얼마나 무서운지, 정치인들의 바른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게 한다.

성을 뺏기면 죽음이나 마찬가지, 죽지 않는 자는 영웅이 아니다.”

 

이원기<청운대 교수·칼럼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