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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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는 낙화암 -42
  • 한지윤
  • 승인 2020.05.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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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과부인은 급히 서찰의 봉을 뜯었다.
서찰을 읽는 보과부인의 얼굴엔 긴장이 서렸다.중대한 밀서임에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밀서를 보고 난 왕비 보과부인은 불을 그어 그 밀서를 태워 버린다.
그리고는 벼루와 종이를 꺼내 무어라 답서를 써서 역시 뜯어지지 않게 봉해 그 여자 밀사에게 다시 건내주었다.
“조심해서 가지고 가거라. 중도에서 잃어버리면 큰 일이니라.”
“명심하겠사옵니다.”
“고달프겠지만 어서 가보아라.”
“알겠사옵니다.”
“이건 가다가 노비로 써라.”
보과부인은 은자 몇 개를 꺼내 밀사에게 주었다.
“돌아갈 노비는 넉넉하옵니다.”
“받아 두거라.”
“네.”
밀사는 보과부인이 내놓은 은자를 집어 넣고,
“왕비마마 옥체 안강하옵소서. 쉰네 물러가옵니다.”
“잘 가거라. 도중에서 조심해야 한다.”
보과부인은 다시 한 번 더 주의를 주었다. 밀사는 왕비의 내전에서 나갔다. 책계왕도 만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다.

그후 며칠이 지났다.
고구려 사신이 책계왕을 찾아왔다. 오래간만에 백제로 온 고구려 사신이다.
왕은 물론 모든 신하들이 눈이 동그레졌다. 날로 강대해 가는 고구려가 무슨 트집을 잡고 싸우려는 것이나 아닌가 해서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사신은 싸울 꼬투리를 가지고 트집을 잡고자 온 것은 아니었다. 백제로서는 천만 뜻밖의 일을 가지고 온 고구려의 사신이었다.
고구려가 지금 우리 한반도에서 한족의 세력을 뿌리째 뽑고자, 낙랑군에 붙어 있던 여러 현의 나라들을 치고자 하는데 힘이 부족하니, 백제로서도 힘을 합해 달라는 요청을 가지고 온 사신이었다. 이같은 고구려의 청을 받은 책계왕은 고구려 사신에게 곧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가 함께 치자는 나라 가운데, 왕비 보과부인의 나라인 대방국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말대로 한반도에서 한족의 세력을 뽑아버리는 일은 백제로서도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기에 왕의 부왕인 고이왕이,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들어 왔을 때, 낙랑의 변두리에 쳐서 백제의 영토를 늘린 것이 아니냐.
헌데, 지금의 책계왕의 처지는 부왕인 고이왕의 처지와는 다르다.
다른 곳은 모르지만, 대방국은 더없이 소중히 여기는 왕비 보과부인의 친정 나라다.
어찌 왕비의 친정 나라요, 왕비의 아버지가 다스리고, 왕비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나라를 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으랴.
공(公)과 사(私)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정에 끌리는 것이 사람임에야 어찌하랴.
왕은 고구려 사신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고, 사처로 나가 편히 쉬게 했다.
고구려 사신은 책계왕의 하는 양을 의심치 않았다. 어느 나라고 국가의 큰일을 임금 혼자서 처리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외국에서 구원병을 청하는 일을, 어찌 임금 혼자 즉석에서 대답할 수 있으랴.
중신 회의를 열어 의논한 끝에 회답을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의심할 일이 아니므로, 고구려 사신들은 사처로 돌아가 편안히 누웠다.
설마하니 백제가, 고구려의 명분 있는 요청을 거절하랴 싶은 마음까지도 지니고, 며칠 동안의 노독을 태평스럽게 푸는 것이었다.

고구려에서 온 사신들의 대접은 영접사에게 맡기고, 왕은 여섯 좌평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거의가 같았다. 지금 백제는 큰 나라로서의 기틀이 잡혀 가는 중요한 때였다.
남의 나라의 침범을 당하지 않는 한, 싸움은 피해야 한다.
어느 나라와도 싸움을 벌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구려의 청을 들어, 한족을 치는 일에는 힘을 합해야 된다.
고구려가 내세우는, 한족의 세력을 뽑아버리는 일은 백제로서도 해야 될 일이고, 또 한 가지는 고구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고구려가 노여움을 사서 한족을 치고 난 뒤 백제를 침범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구려와 힘을 합해, 한족을 치는 일은 쉬운 일이지만, 강대국 고구려의 침범을 막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왕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문제는 고구려와 함께 치려는 나라에, 왕비 보과부인의 친정 나라 대방국이 있다는 일이었다.
왕은 눈을 감은 채 신하들의 의견을 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민족적인 큰 일, 왕비의 친정 나라.
어느 한 가지도 왕으로선 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경들의 뜻은 익히 알았으니, 이쯤 돌아들 가오. 깊이 생각해서 해결하겠소.”
왕은 신하들을 돌려보냈다.
그날 밤 왕은 늦도록 자리에 눕지 않고, 안석(案席)에 기대 눈을 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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